[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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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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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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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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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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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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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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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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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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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