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8-07(월)
 

[지식의 열쇠]
(누가복음 11:37-54)

1. 지식의 열쇠?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주님을 향해
어떤 서기관(율법학자)이 말했다.

(눅 11:45, 새번역) 율법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위선자임을 말한 셈이다.
이 말을 듣고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에 
'지식의 열쇠'라는 표현이 나온다.

(눅 11:52, 새번역)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서기관들이 화를 당할 이유 중에 중요한 이유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막은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지식의 열쇠는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의 소유며 
그것의 용도는 무엇일까?

2.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다

서기관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이 '율법학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서기관 뿐 아니라 바리새인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지식의 열쇠를 가로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눅 11:43, 새번역)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면서 
높은 자리에 앉고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율법을 자신의 존경의 이유로 삼은 것이다.
존경 받고 높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눅 11:39,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그들은 겉 즉 외모는 깨끗하게 꾸미고 거룩한 척 했지만
그들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다.

속에 있는 더러움과 탐욕과 욕망을 숨기고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왜 '지식의 열쇠'와 관계가 있을까?
겉은 깨끗한데 속은 더럽기 짝이 없는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다루고 해석하는 권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어
일반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직접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더러움을 숨기는 쪽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율법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아 버린 패역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

3. 이 시대

중세시대의 암울함의 이유가 많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 해석의 권한이 
사제에게만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제만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고 
일반 신자들은 사제의 가르침을 듣기만 했다. 
성경을 읽을 권리조차 박탈했으니,
중세 시대 의 카톨릭 사제들은 참으로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었기 때문에 
면죄부를 마음껏 판매할 수가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타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후손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성경 해석의 권리가 마치 목사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초대형교회의 목사가 
코로나를 막아준다는 카드를 나눠준다고 했단다.
그 교회 다닌다는 교인 중 한 사람이 
말씀 묵상 세미나에 한번 참석하셨다. 

강의가 끝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나에게 인사를 하셨는데 
그 다음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경공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설교만 잘 듣고 잘 순종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기독교인가 싶었다.
종교개혁은 사제의 손에만 들려 있던 성경을
일반 신자에게 되돌려준 것인데,
종교개혁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목사만 성경 해석의 권리를 가진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었으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었던 책망을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이 시대의 많은 목사들이 
마땅히 모든 신자의 손에 들려져야 할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신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이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빼앗겨 결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4.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모든 형식을 거부하고 '~교회'라는 모임도 거부하고 
주일예배, 헌금, 십일조 등을 
타락한 껍데기로만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거부해야 할까?
안만 깨끗해지면 되니 겉은 마음대로 해도 될까?
형식은 거부하고 내용만 충실하면 되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1:42 b, 새번역)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겉인 '십일조를 비롯한 형식과 제도'도 올바르게 지켜야 하지만
안인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쉽지 않은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겉과 속을 다 강조하는 균형 잡힌 교회를 찾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신자 각자가 자신이 죽지 않고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떤 길이 죽지 않고 살 길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열쇠'다.
빼앗긴 지식의 열쇠를 되찾아야 한다.
교회가 타락했으니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은
신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다.

지식의 열쇠를 신자들에게 돌려주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찾고 또 찾아야 한다.
그런 교회가 잘 없기 때문에 거의 삶을 걸고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몇 년이 걸리더라고 찾아다녀야 한다.
죽고 사는 문제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찾고 또 찾았음에도 못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지식의 열쇠를 신자에게 돌려주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라도 해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냥 교회를 저버리고 소위 '가나안 성도'가 되면 안 될까?
그렇게 하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겠지만
신앙생활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신앙공동체에 속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죽도록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빼앗겼던 '지식의 열쇠'를 되찾아주는 공동체에 
반드시 소속이 되어야 한다. 

5. 나는?

어릴 때와 젊은 시절을 통해 교회에서 본 목사님들은 
늘 무게를 잡고 천천히 말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섰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계급'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성경을 내용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목사들의 전유물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의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해답을 찾지 못해서 
늘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목사님 찾아가서 일일이 물을 수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과 고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데 
이런 문제들과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가 경험하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해답은 목사님에게 있지 않고 말씀에 있음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교회 안을 보면서 답답했다.
목사를 중심으로 해석되는 이상한 성경 해석이 너무 많았고 
교인들은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말씀에 관심이 없었다.
말씀은 의례껏 목사님이 가르치는 것,
목사님만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말씀을 해석하는 어려운 것에는 신경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집사의 신분으로 목사님 찾아가서
'말씀묵상세미나'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드려서 허락을 받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말씀묵상세미나를 나는 왜 했을까?
살고 싶어서였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명을 누려가고 있는데
묵상한 말씀을 나누지 않으니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나눔이 없으면 말씀묵상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말씀으로 사역하려면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했고 
부산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경기도로 이사해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목사로 살아가는 지금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신학공부를 조금 한 목사이기 때문에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나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
패역한 짓을 하지 않는지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신자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스스로 말씀을 해석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도록
훈련하고 격려하는 것을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반신자였을 때 거의 평생을 
말씀을 나누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으나 실패해왔다.
목사가 되기도 전에 말씀의빛교회를 개척한 이유는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지금 나의 삶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말씀의빛교회라는 묵상 공동체가 세워져서 
성도들과 아름답게 묵상한 말씀을 통해 교제하고 있고,
온라인 묵상 나눔방 모임에서도 신자들이 
자신의 묵상을 나누고 서로의 묵상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 
아름다운 묵상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 스스로 말씀을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신학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말씀을 해석하면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을까?
등의 염려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묵상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말씀묵상 공동체가 되는 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목회자는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가르치고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묵상하다가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목회자도 한 사람의 신자로서 말씀을 스스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묵상을 멈추지 않는 공동체가 
가장 건강한 공동체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하는 모임이 된다면  
목회자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지 않고 
원래 주인인 모든 신자에게 지식의 열쇠를 돌려주어서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식의 열쇠'를 신자 개개인에게 돌려주는 
이 놀라운 기쁨을 누려갈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아침이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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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지식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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