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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 트랙제로 3월 ‘이달의 아티스트’ 선정 ‘노래하는 목사’ 황푸하
    [사진제공=멜론] 싱어송라이터 황푸하가 ‘노래하는 목사’라는 독특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과 자신만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털어놓는다.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은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를 통해 3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싱어송라이터 황푸하와 함께 한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들을 2일 오전 10시30분 멜론 스테이션에서 공개한다. 포크 뮤지션인 황푸하는 이날 멜론 스테이션 ‘트랙제로’ 초대석에 출연해 ‘노래하는 목사’가 된 비하인드 스토리, 이름에 담긴 뜻,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 숨은 명곡 플레이리스트 등을 전한다. 이어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이자 출애굽기(Exodus)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담은 앨범 ‘두 얼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며 리스너들과 소통할 예정이다.신앙 생활과 음악 두가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푸하는 “아름다움, 사랑 등이 ‘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노래’가 신을 볼 수 있는 창문인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철학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이와 함께 황푸하가 지금까지 발매한 명곡들을 담은 ‘트랙제로’ 플레이리스트도 멜론에 이날 공개된다. ‘첫 마음’, ‘칼라가 없는 새벽’을 비롯해 김사월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멀미’ 등 총 15트랙의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들은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뿐만 아니라 황푸하는 ‘멜론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세번째 앨범 ‘두 얼굴’을 통해 파격적인 도전을 하게 된 이유와 에피소드 등을 밝히고, ‘아름다움’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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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축복의 회복을 위하여(학개 2:10-19)"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성 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 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0-19)“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 제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했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과 장정들과 기술자 등 많은 유다 인 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십 년 세월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처럼 우상(偶像)을 숭배하며, 온갖 악행(惡行)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20). 그런데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 제국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 인 포로들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역사(役事)였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역대하 36:21-23).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유다 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회복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건자재를 구입하고 필요한 인부들을 고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지 이년 두 달 만에 예루살렘성전 재건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방해하는 주위의 적들 때문에 겨우 <전 지대공사(殿地臺工事)>만을 마친 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시들어지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정도 같이 시들어 들었고, 그들은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전건축을 계속 미뤘습니다. 그러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인들은 하나같이 재산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화려한 저택을 지어 기거하며 쌓은 부를 과시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이전의 신앙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목표로 했던 신앙공동체의 삶이 이제는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삶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적 습관은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외적의 침입과,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그 형편이 말할 수 없이 궁핍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자청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같은 가난과 궁핍의 원인을 알지 못한 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셨고,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전복구공사를 재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어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개 1:9-11)“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인본주의적 신앙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학개 1: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과, 그 결과로 그 많은 재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 닥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했고, 이전처럼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의 재산을 드리고,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신앙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중심주의 삶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다시 임 재하셨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로다! (학개 2:4)“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축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1:12)“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되고 범사가 잘 됩니다. 우리에게서 상실된 축복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상실된 신앙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신본주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의 삶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기에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이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신본주의의(神本主義) 삶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 되고 하나님께 소유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기에 신본주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고 다시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9-10)“ (3) 죄를 멀리하는 삶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1-14)“ (4)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입니다(마태복음 22:37-40,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5)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옛날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궁궐을 짓고,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궁궐 밑에 감옥을 지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럽의 구질서는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개척시대의 청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예배당을 지었고, 다음으로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신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에 의거한 미국의 가치관과 미국의 시민정신이 근대 문명사회의 확립을 위한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는 43세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 때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락도 즐기지 않았고,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만이 그의 취미였고, 사업확장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미국 내 동종사업자들을 무자비하게 파산시켜 모두 그의 회사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석유사업의 95퍼센트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그에게는 악덕기업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한 교회에 거금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을 때,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고 선언하며, 그 기부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10만 달러는 참으로 거금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그의 나이 53세 때,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바로 그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몸에 악성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빠져나갔습니다. 식사 때 마다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까지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 불안함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쁨과, 행복감을 상실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갔습니다. 록펠러를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1년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그를 미워하는 언론사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미리 작성해놓고, 그의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자답게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재산을 교회와, 사회 복지시설과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또 인류의 복리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식량, 인구, 의학,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활동>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재산관리인들에 의해서 문서에 작성된 용도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발명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연 기적의 약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위해서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이 이처럼 다방면으로 인류복리를 위해 쓰이게 될 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악으로 치닫던 그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정상적으로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무표정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가 일년도 못살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후 45년을 더 살며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신자인 그가 탐욕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고, 그와 함께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9)“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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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5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사도행전 15:30-41)"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수일 후 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 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 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35-41)“ 1.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4-26)“ <안디옥>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시>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 째로 큰 대도시였습 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오십 만 가량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으로 피신을 가 그곳에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유대인>들만의 교회였 다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이라는 벽을 허물고 편견 없이 모두를 품는 <이방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 없는 안디옥 교회가 날로 부흥되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이끌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하에 안디옥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고,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안디옥 교회에 이제는 함께 이끌어줄 <동역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그가 오래 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나 잠시 교류했던 <다소> 지방의 <사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소>는 오늘날의 <터기>의 남부지방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울은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에 열심인 자로서,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도록 사주하는 등, 그의 과거의 악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의 기피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진정을 이해하고 포용해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으로 사울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아량과 덕이 많은 <야고보 사도>에게 소개시켰습니다(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 -19).그럼에도 사울은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곧 바로 고향 다소로 돌아가야 했고, 사울의 가치를 알아봤던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도행전 9:26-30).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안목은 적중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 했으며, 사울의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는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자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전도>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의 지시 에 따라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울의 탁월한 <전도의 능력>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 행전 9:15-16)“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방인 교인>들도 <유대인 교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 를 받아 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교란시켰습니다. 이 문제로 이들과 크게 다투며 논쟁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의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의 보고를 기뻐한 예루 살렘 교회 지도부는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즉시로 <지도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교회공동체> 안에 더 이상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각 <지 교회>에 내려 보내는 편지로 작성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먼저 가장 큰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전달을 위해 안디옥으로 귀환을 했고, 이로써 그들의 전도여행도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5:1-35).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재개했습니다만,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지 교회들>이 생각나,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위한 <팀 구성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고, 각각 다른 길로 떠나버립니다. <의견대립의 원인>은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떠난 전도단의 멤버였었는데, <전도사역의 효용성>에 회의를 품은 그는 <밤빌리아>에서 그들 일행과 결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때의 일로 그에게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단호하고 엄격했던 바울 사도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가의 일로 크게 다툰 후 결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제각기 따로 전도단을 구성해서 떠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향해 떠났습니다. 구브로를 <헬라어>로 <쿠프로스(κύπρ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구리>입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리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퍼(Kupper)>, 영어의 <코퍼(Copper) >는 헬라어 <쿠프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브로가 지금의 <키프러스(Cyprus)>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의견차이>로 <결별>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그들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27-28)“ 비록 1차 전도여행으로 유명해진 바울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바나바의 배려로 2차 전도여행에 합류 한 젊은 마가는 바나바의 감화력과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성장하였는데, <신약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로 그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후 다른 기록자들이 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상호보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그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부했던 마가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뒤늦게 그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해준 것이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4:11)“ 그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라도 그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알린 것입니다. 열정만 앞섰지 다듬어지지 못한 마가를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것은, 다름아닌 바나바 의 <사랑과 인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재의 모습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라(Silas)>를 2차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와 교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실라와의 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소아시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성령께서는 도중에 소아시아로 향하 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6-10). <마게도냐>에서 첫번 째로 당도한 성이 <빌립보>였는데, 이곳에서의 <실라>의 역할은 아주 유용했습 니다. 첫째는 그가 마게도냐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로마황제에게 충성했던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의 주민들>에게는 <식민지 거주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언어와 신분 상으로 그들과 대등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라는 여러 면에서 <유럽 선교>에 매우 적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로마서 8:27-28) 4. <인간의 의지> 가운데 <동역(同役)>하시는 하나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신학용어(神學用語)> 가운데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류(同流)>라는 뜻인데 '서로 돕다‘, '협력하다‘를 의미하는 <concur>의 명사형입니다. 이 <동류(concurence)>는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작용>되어,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는 당시 본인들이 깨닫지는 못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학교이지만 1924년경만 해도 이 학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쉐퍼 박사> 바로 옆에서 기도하든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문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닙니까? 그 가축들 중에서 얼마를 팔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가 그 돈으로 이 학교의 빚을 다 갚고, 계속하여 학생들을 양육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에 가축을 가득 싣고 가서 다 팔았습니다. 저는 원래 이 돈을 다른데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이 돈을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니 받아 주십시요! “ 사무실 여자 직원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즉시로 학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여직원으로부터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로 보내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이 목장주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달라스 신학교의 문제해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목장주의 의지>에 그대로 <작용> 한 결과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당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동역(同役)>해주시는 축복된 신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아멘! >
    • 종교
    2023-02-09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후포스타시스’ – 실상과 증거를 가진 믿음”
    [성경/365산업경제뉴스DB] 2005년 5월 31일 새벽 3시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시고 벽시계로부터 흡사 레이저 광선처럼 내 이마 한 중앙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쏘아주셨다. 한 달 후에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영어로 ‘Faith Test’- 믿음 시험이라는 음성이 쑥 찔러졌다. 결국 성령받은 지 33년 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세월이 믿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러했던 것을 알게 하셨고, 이제부터 믿음 시험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들려온 음성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며 댓가를 치르는 희생을 감내하며 이번 5월이면 만 18년이 되는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최종관문인 지금의 오래참음과 인내의 자리까지 따라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 인내의 결과는 이제 약속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5). 처음에 보여주신 천 개의 퍼즐이 맞혀져 그림이 완성되듯이, 믿음-순종-희생-인내의 긴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제 약속의 땅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믿으면” 하고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을 보는 것이며, 풍부함과 풍성한 재정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그동안의 기름부으심을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나라들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부흥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적 계시로 그가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어 믿고 선포하면 현실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하리운에 오래 같이 해 온 분들에게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이번 소드 3년차 ‘조명된 혼과 감취인 것” 질문의 답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 예언에 비추어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때에 그가 하실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나가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2주 전, 혹은 1주 전 말씀하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하셨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번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며 묻고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음으로 묻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일이 패턴화 된 실상과 증거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매 번 같이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주세요” 하고 응답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치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선입견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어떤 일을 주님이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100%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음성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의 리콜운동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그러한 패턴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 가면 “불이 있을 것이다. 통곡이 있을 것이다” 하셨을 때, 나가기 전에 미리 글로 선포하면 그런 일들이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코비드 19이 기승을 부려 나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때인 2020년 5월 “이번에 나가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만남을 통해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고, 아내에게 그해 11월 “이번에 20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신 집회 전 정확히 20명이 들어오고 난 후, 핸폰이 깨어져 연락을 더 못받게 하셨으며, 그후 “더 들어올 것이다” 하신 대로 집회 중 기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 등, 수없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처음 참석한 두 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하고 예언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강력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목요일 소드 3년차에 다룰 초대교회가 가르친 믿음의 헬라어 원어 중 ‘후포스타시스’ 믿음인 것이다. “‘후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예감하고 여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소유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없이 믿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시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일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시는 것이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 주님께서 어제 새벽에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사업하는 한 여집사님에게서 그 전날 전화로 사업체 매각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해와 기도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하리운 밴드에 500명이 있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제 에베드 전도사님이 이미 밴드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가입시켜 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와 가입시켜 준 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전화하고 올 사람이 천 명이다” 하셨고, 이번 천 명 여자 목사들을 시작으로 이전부터 “30명이 준비되면 군대가 온다, 2천, 4천이 온다. 풍성한 재정이 올 것이다”의 실현인 것이다. ***보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다. 그들은 열매를 누리는 선두주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듣고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 눈에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이다. 아직 자아가 굴복되지 않았고 주님과 진리보다, 주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일과 사역이 더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일이 많아서, 사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과연 하나님의 일을 두고 무엇이 바쁘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는 아니다 그래서 구분된다 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셨다. 그동안 1년 넘게 하리운에 몸담은 분들은 막연히 바라는 그런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제 그 믿음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리운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시대적/전국적/세계적 부흥의 영광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다!” “내 일처럼, 내 가정 일처럼, 내 사업하는 것 처럼 하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믿는 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대로 순번이 정해지고 있다. 땡큐 로드. 크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종교
    2023-02-08
  • [오늘의 말씀]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1:1∼4)"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1] <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2] 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3]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4] <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5] 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6] <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7] 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8]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9] 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
    • 종교
    2023-02-04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격려하고 들어주고 위로해 주라”
    [365사업경제뉴스DB] 오늘 이곳 토요일 새벽에 “마음에는 안들고 그것 밖에 못하나?” 생각하지 말고, 그 수준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라 하셨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그 정도 밖에 못하나? 그러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좋은 교사는 같은 연령대라도 다 발달 정도가 다르니 잘하는 학생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있는 수준에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어 더 나은 성적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장이나 숙제 검사에 웃는 그림과 함께 “참 잘했아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칭찬하면 좀 부족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격려는 가능성을 더욱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폴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시련은 더욱 단단하게 하는 단련, 그리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준에서 잘한다 칭찬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성장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우리 하리운 회원 한 분을 보여 주시면서 어려웠던 때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라. 치료해 주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날에 대한 기억의 깊은 내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상처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하셨다. 내적치유 훈련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지만, 같이 모여 있어 치유를 위한 실제 사역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론은 알지만 아직 치유받지 못한 감정 치유와 참된 용서를 통한 자유함을 얻도록 도움을 주라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배웠고 또한 “회개했다, 용서했다, 내적치유를 많이 받아 봤다” 하면서도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이 실제 믿음이 되기 전에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아직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 종으로 팔려가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 없이 인내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고난 속에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해를 선으로 바꾸셨다” 고백하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후대한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내적치유는 상한 마음의 치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치유하시고 우리의 뿔(권세)을 높이셔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로 쓰시기 원하신다. 주의 행사(하시는 일)를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주를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2). 시편 92:4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편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삶의 목적과 사명을 알도록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종교
    2023-02-03

실시간 종교 기사

  • 명성선교회 시므온 리 선교사,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출12:21 21 וַיִּקְרָ֥א מֹשֶׁ֛ה לְכָל־זִקְנֵ֥י יִשְׂרָאֵ֖ל וַיֹּ֣אמֶר אֲלֵהֶ֑ם מִֽשְׁכ֗וּ וּקְח֨וּ לָכֶ֥ם צֹ֛אן לְמִשְׁפְּחֹתֵיכֶ֖ם וְשַׁחֲט֥וּ הַפָּֽסַח׃모쉐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양을 끌어내어 너희 가문대로 취하여 유월절 제물로 잡아라.22 וּלְקַחְתֶּ֞ם אֲגֻדַּ֣ת אֵזֹ֗וב וּטְבַלְתֶּם֮ בַּדָּ֣ם אֲשֶׁר־בַּסַּף֒ וְהִגַּעְתֶּ֤ם אֶל־הַמַּשְׁקֹוף֙ וְאֶל־שְׁתֵּ֣י הַמְּזוּזֹ֔ת מִן־הַדָּ֖ם אֲשֶׁ֣ר בַּסָּ֑ף וְאַתֶּ֗ם לֹ֥א תֵצְא֛וּ אִ֥ישׁ מִפֶּֽתַח־בֵּיתֹ֖ו עַד־בֹּֽקֶר׃그리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대접에 있는 피에 적셔 그 대접의 피를 인방과 두 문설주에 발라라. 그리고 너희는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에서 나가지 말아야 한다. 모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불러모아 말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이유는 모든 백성을 불러모으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고 장로들에게 전하면 시간과 노력이 절감되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동체에서 리더가 모든 것을 다 하려면 힘이 든다.리더는 공동체내의 스텝들에게 일을 분담시키는 것이 좋다. 우리는 단순히 힘든 것을 감소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스텝에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후일에 리더가 될 수 있는 재목으로 훈련을 시켜야 한다. 한국의 대형교회 리더들이 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목회를 하다가 은퇴를 하면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큰 혼란을 겪는 것을 자주 본다. 주님,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리더가 스텝을 믿어주고 일을 맡겨서 잘 훈련시키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 23 וְעָבַ֣ר יְהוָה֮ לִנְגֹּ֣ף אֶת־מִצְרַיִם֒ וְרָאָ֤ה אֶת־הַדָּם֙ עַל־הַמַּשְׁקֹ֔וף וְעַ֖ל שְׁתֵּ֣י הַמְּזוּזֹ֑ת וּפָסַ֤ח יְהוָה֙ עַל־הַפֶּ֔תַח וְלֹ֤א יִתֵּן֙ הַמַּשְׁחִ֔ית לָבֹ֥א אֶל־בָּתֵּיכֶ֖ם לִנְגֹּֽף׃여호와께서 미쯔라임인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인방과 두 문설주의 피를 보실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어가셔서 그 파멸시키는 자가 너희 집들에 들어가서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쯔라임 사람들을 치시려고 미쯔라임 땅을 지나가신다.하나님께서 미쯔라임 땅에 내려오시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역하는 미쯔라임 사람을 재앙으로 치시려는 것이다.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쯔라임에서 구원해 내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는 이유도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를 재앙으로 치시려는 것이다.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내어 보호하시려는 것이다. 첫 번째에 속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두 번째에 속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이 너무나 반가울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종말의 때에 살고 있다.나는 어떤 쪽에 속하여 살 것인가는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려있다. 주님, 우리와 우리 가문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인내함으로 삶에서 말씀순종 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는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 하나님께서 미쯔라임 땅을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파멸시키는 자에게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다. 재앙을 받지 않고 재앙이 넘어가는 방법은 오직 그 집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다.즉 어린 양이신 예슈아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주님, 우리의 가문에서는 모든 자손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재앙이 임하는 때에라도 구원을 받는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
    • 종교
    2021-02-08
  • 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지식의 열쇠'
    [지식의 열쇠](누가복음 11:37-54)1. 지식의 열쇠?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주님을 향해어떤 서기관(율법학자)이 말했다.(눅 11:45, 새번역) 율법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자신도 모르게 자신도 위선자임을 말한 셈이다.이 말을 듣고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에 '지식의 열쇠'라는 표현이 나온다.(눅 11:52, 새번역)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서기관들이 화를 당할 이유 중에 중요한 이유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막은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지식의 열쇠는 무엇이며그것은 누구의 소유며 그것의 용도는 무엇일까?2.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다서기관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그들이 '율법학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서기관 뿐 아니라 바리새인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쁜 것일까?그럴 리가 없다.그러면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지식의 열쇠를 가로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눅 11:43, 새번역)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면서 높은 자리에 앉고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율법을 자신의 존경의 이유로 삼은 것이다.존경 받고 높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눅 11:39,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그들은 겉 즉 외모는 깨끗하게 꾸미고 거룩한 척 했지만그들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다.속에 있는 더러움과 탐욕과 욕망을 숨기고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했다.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왜 '지식의 열쇠'와 관계가 있을까?겉은 깨끗한데 속은 더럽기 짝이 없는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다루고 해석하는 권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어일반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직접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그리고 자신들의 더러움을 숨기는 쪽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율법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아버린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아 버린 패역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3. 이 시대중세시대의 암울함의 이유가 많이 있었지만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 해석의 권한이 사제에게만 있었다는 것이었다.사제만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고 일반 신자들은 사제의 가르침을 듣기만 했다. 성경을 읽을 권리조차 박탈했으니,중세 시대 의 카톨릭 사제들은 참으로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던 것이다.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었기 때문에 면죄부를 마음껏 판매할 수가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타락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후손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떨까?놀랍게도 성경 해석의 권리가 마치 목사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유명한 초대형교회의 목사가 코로나를 막아준다는 카드를 나눠준다고 했단다.그 교회 다닌다는 교인 중 한 사람이 말씀 묵상 세미나에 한번 참석하셨다. 강의가 끝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나에게 인사를 하셨는데 그 다음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교회에서는 성경공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설교만 잘 듣고 잘 순종하면 된다고 합니다."그게 무슨 기독교인가 싶었다.종교개혁은 사제의 손에만 들려 있던 성경을일반 신자에게 되돌려준 것인데,종교개혁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목사만 성경 해석의 권리를 가진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었으니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었던 책망을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너희에게 화가 있다!"이 시대의 많은 목사들이 마땅히 모든 신자의 손에 들려져야 할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신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이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빼앗겨 결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4. 어떻게 해야 할까?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모든 형식을 거부하고 '~교회'라는 모임도 거부하고 주일예배, 헌금, 십일조 등을 타락한 껍데기로만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거부해야 할까?안만 깨끗해지면 되니 겉은 마음대로 해도 될까?형식은 거부하고 내용만 충실하면 되는 것일까?그 의문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1:42 b, 새번역)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겉인 '십일조를 비롯한 형식과 제도'도 올바르게 지켜야 하지만안인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쉽지 않은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겉과 속을 다 강조하는 균형 잡힌 교회를 찾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정답은 없다.신자 각자가 자신이 죽지 않고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어떤 길이 죽지 않고 살 길일까?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열쇠'다.빼앗긴 지식의 열쇠를 되찾아야 한다.교회가 타락했으니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은신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다.지식의 열쇠를 신자들에게 돌려주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찾고 또 찾아야 한다.그런 교회가 잘 없기 때문에 거의 삶을 걸고 찾아야 할 것이다.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몇 년이 걸리더라고 찾아다녀야 한다.죽고 사는 문제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그렇게 찾고 또 찾았음에도 못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그렇다면 지식의 열쇠를 신자에게 돌려주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라도 해야 한다.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그냥 교회를 저버리고 소위 '가나안 성도'가 되면 안 될까?그렇게 하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겠지만신앙생활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어떻게든 신앙공동체에 속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그렇기에 죽도록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건강한 공동체를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빼앗겼던 '지식의 열쇠'를 되찾아주는 공동체에 반드시 소속이 되어야 한다. 5. 나는?어릴 때와 젊은 시절을 통해 교회에서 본 목사님들은 늘 무게를 잡고 천천히 말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섰다.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계급'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성경을 내용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목사들의 전유물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의 삶에서 부딪히는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해답을 찾지 못해서 늘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목사님 찾아가서 일일이 물을 수도 없는지극히 개인적인 갈등과 고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데 이런 문제들과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가 경험하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해답은 목사님에게 있지 않고 말씀에 있음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교회 안을 보면서 답답했다.목사를 중심으로 해석되는 이상한 성경 해석이 너무 많았고 교인들은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말씀에 관심이 없었다.말씀은 의례껏 목사님이 가르치는 것,목사님만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아니, 말씀을 해석하는 어려운 것에는 신경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집사의 신분으로 목사님 찾아가서'말씀묵상세미나'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드려서 허락을 받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말씀묵상세미나를 나는 왜 했을까?살고 싶어서였다.말씀을 묵상하면서 생명을 누려가고 있는데묵상한 말씀을 나누지 않으니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나눔이 없으면 말씀묵상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말씀으로 사역하려면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했고 부산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경기도로 이사해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목사로 살아가는 지금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신학공부를 조금 한 목사이기 때문에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나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패역한 짓을 하지 않는지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신자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스스로 말씀을 해석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도록훈련하고 격려하는 것을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일반신자였을 때 거의 평생을 말씀을 나누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으나 실패해왔다.목사가 되기도 전에 말씀의빛교회를 개척한 이유는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서였다.지금 나의 삶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말씀의빛교회라는 묵상 공동체가 세워져서 성도들과 아름답게 묵상한 말씀을 통해 교제하고 있고,온라인 묵상 나눔방 모임에서도 신자들이 자신의 묵상을 나누고 서로의 묵상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 아름다운 묵상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이다.신자 스스로 말씀을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신학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말씀을 해석하면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을까?등의 염려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필요한 것이 '묵상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말씀묵상 공동체가 되는 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목회자는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가르치고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묵상하다가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목회자도 한 사람의 신자로서 말씀을 스스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묵상을 멈추지 않는 공동체가 가장 건강한 공동체가 아닐까 생각된다.그렇게 하는 모임이 된다면 목회자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지 않고 원래 주인인 모든 신자에게 지식의 열쇠를 돌려주어서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지식의 열쇠'를 신자 개개인에게 돌려주는 이 놀라운 기쁨을 누려갈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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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7
  • 감리교신학대학교 설교학 이성민 교수, '반석이시며 생명수 되시는 예수'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시 105:8)105편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다고 노래합니다(8-9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이 약속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반석이며 그를 믿는 자는 생명수를 마십니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41절).” 찬미예수.“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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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7
  • 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 '뭣이 중요한지 알면 현혹되지 않는다'
    뭣이 중요한지 알면 현혹되지 않는다1. 샬롬!모두들 한 주 동안도 믿음의 삶을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내일 주일도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드립니다.어제는 점심 식사 후 개척 목회 코칭, 멘토링을 하시는 분들과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부족함에도 5시 30분까지 계속 피드백을 주고받았습니다. 바로 이어서 연애와 결혼 코칭, 멘토링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함께 식사 후 10시가 넘도록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 정리 후 집에 오니 11시 즈음 되어 페북을 못들어왔어요.2. 아무튼 점심 식사 후 개척 목회 코칭, 멘토링에 참여하신 분들과 많은 은혜를 누렸는데요. 성령님과 글쓰기, 성령님과 인도하심, 성령님과 행동하는 믿음, 지금 각자의 상황속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나눈 주제마다 좀 더 목회에 적용하시고자 계속 질문해주시고 또 얼마나 열정적으로 필기까지 하시는지... 제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해서 송구한 마음이었습니다. 3. 개인적으로 감사한 부분은 모두들 경험하시듯이 나누면서 제가 더욱 배운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며 나누다보니 제 안에 그동안 잘 정립시켜주셨던 부분들도 재점검하게 됩니다. 제게 주신 비전들도 점검하게 됩니다. 영화 곡성의 명대사를 잘 아실 겁니다. <뭣이 중헌디?><현혹되지 마소>4. 이 말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듯합니다.<뭣이 중요한지 알면 현혹되지 않는다.><현혹되면 뭣이 중요한지 모른다.> 개척의 비전을 가지신 분들과 치열하게 문답하고 교제 나누며, 곡성의 명대사처럼 제 삶과 사역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제 삶과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혹시 현혹, 미혹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5.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주제를 나누든지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친밀하심입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있는 내용, 나눔이어야 합니다. 어떤 주제든지 저보다 지식적으로 탁월하게 나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자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을 읽고 배웁니다. 그러나 지식은 차츰 좋아질 수 있습니다. 6. 다만 제게 하나님 중요하게 여기시는 부분은 아직 지식은 부족해도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을 제 입장에서도 최선을 다해 존중해드리며 바라보기를 사모합니다. 가령 설교나 글쓰기의 평소 준비는 균형있는 독서생활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설교나 글쓰기를 위한 독서에 매이지 않습니다. 독서는 그냥 목사로서 제 생활의 일부이며 기본입니다.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책은 보고만있어도 예쁘고 기쁘고 즐겁지요. 7. 그러나 성령님을 24시간 놓치지 않기 원하는 제 마음가짐은 양가감정이 교차합니다. 가장 행복한 일이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면서도, 이것을 놓치면 제 삶은 의미없다고 느낄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다 할까요.지나치게 스트레스 받는 것은 결코 성령님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제 영적 유익을 위해 적당히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8. 이제 저는 다시 내일 예배를 위해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준비하려고 합니다. 저희 NEW LIFE 새생명교회는 내일도 방역지침을 지키며 성도님들을 나눠서 1~2부로 예배드립니다. 비대면으로 예배드리실 분들을 위해 설교 영상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 교회들마다 내일도 최선을 다해 예배드리시고자 다양한 형태로 준비하셨을 줄 압니다. 섬기시는 교회마다, 예배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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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6
  • 샤마임 영성 공동체 대표 정경호 목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어제는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동생 목사님을 잠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개척한지 벌써 2년째가 되었는데, 벌써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지 못함에 대한 불편함이 있지만, AI 시대에 걸맞는 목회를 해가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찬양'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모든 음악을 편집해서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생이지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는데, 찬양과 영성으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보여서 격려와 함께 부흥의 역사가 임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척이기에 쉽지만은 않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또 다른 역사들이 기다릴 것임을 믿기 때문에 부흥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제 형제 중에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 저까지 3명입니다. 두 분은 서울과 성남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고, 저는 조용한 시골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포스트코로나'와 'AI'시대를 살아가는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상'을 요구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영상 영성 세미나'를 이번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답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답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예수기도-ConQ.T 영상 영성 세미나'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새로운 비전이 보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제 마음에 '이 영성 수련법'들을 보급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열정을 불태워야 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오늘 묵상은 여호수아 11장 7-15절 말씀입니다.7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 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에 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에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10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하솔을 불로 살랐고12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13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세운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14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15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하솔 왕 야빈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솔을 중심으로 모인 연합군을 여호수아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전쟁은 엄청난 빠르기로 모든 대적들의 성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바 대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적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었고 병거를 불 살랐습니다. 10절에 하솔은 모든 나라들의 머리였다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전쟁을 치렀던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왕이었습니다. 그런 머리된 왕을 칼날로 쳐죽였습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의 원복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여자의 후손의 역사가 본문에 스크랩되어 스칩니다. 우연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전쟁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결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의 머리가 깨어지게 됩니다. 이를 상징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전쟁은 가나안의 머리가 된 왕 하솔을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진멸합니다. 악의 모든 모습들을 땅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이 주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이런 전쟁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가르쳤던 내용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영적 아버지요 영도자였던 모세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배운 바 대로 전쟁에서 모두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호수아의 모습에 기뻐하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는 항상 전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오늘은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15)"라는 말씀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배운 바의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배우느냐도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배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종이었습니다. 이 배움에 정통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면 이상한 배움을 가지고 교회를 혼돈에 빠지게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누구에게 배웠느냐? 사도성이 있느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자신의 배움의 줄기로 잡지 않는 자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이단은 사도의 정통성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했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자 하나님의 권능이 여호수아와 함께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대로,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대로 무엇인가를 행하면서 자신의 야심을 채우려고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은 여호수아에게 임했던 역사에서 멀리 벗어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통 신학이 중요합니다. 신학을 배우고 영성을 수련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더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르쳤던 흐름이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살아 움직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역사는 정통의 신앙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기도사랑과 자비의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여호수아가 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는지를 알게 하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주님, 명령하신 바 대로 행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되 사도성의 정통성의 흐름 속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영적 전쟁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성령의 권능을 주시옵고, 참된 말씀의 역사 속에서 올바른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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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우면동교회 정준경 목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0) 70명의 제자들이 전도하러 다녀와서 예수님께 흥분하며 보고를 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구경꾼들은 이런 기쁨을 맛 볼 수 없습니다. 일꾼들만 맛 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주님은 사탄이 번개 같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엄청난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그런데 사역의 열매를 보면서 기뻐하기는 쉬워도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기쁨은 숨겨진 기쁨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주님, 성취하고 승리자가 되는 기쁨 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더 큰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 종교
    2021-02-02
  • 샤마임 영성 공동체 대표 정경호 목사, '단번에 승리하는 성스러운 전쟁'
    단번에 승리하는 성스러운 전쟁영상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교회에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고심이 몇 주 동안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현대신학의 흐름 중에서 가장 치열한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치열하며 예민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됨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우리의 신학과 믿음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립되지 않으면 성도들의 믿음 생활에 혼란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동방과 서방 교회의 '필리오케' 논쟁도 서로의 생각 차이에서 갈렸던 것처럼, 이 문제 또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신학적 논쟁은 신학자들에게 맡기고 저는 '예수기도-ConQ.T 영상 세미나'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물론 올 한해 이 부분에 대한 제 글도 연구해서 발표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영성이 살아야 합니다. 기도가 살아야 합니다. 포스트코로나로 인한 교회의 침체는 다시 기도의 영성을 통해서 회복을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하심이라 생각합니다.오늘 묵상은 여호수아 10장 29-43절 말씀입니다.29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와 싸우매30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31 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립나에서 라기스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우더니32 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33 그 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의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34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라기스에서 에글론으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워35 그 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을 쳐서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당일에 진멸하여 바쳤으니 라기스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36 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에글론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싸워37 그 성읍을 점령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38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돌아와서 드빌에 이르러 싸워39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같았으며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40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41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4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43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기 시작합니다. '성전'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의 전쟁의 역사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진행되는데 연승을 거두게 됩니다. 가는 곳 마다 승리합니다. 립나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게 되었는데,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기스와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성을 점령하게 되는데 "립나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32)"라고 기록합니다. 계속되는 전쟁은 에글론, 헤브론, 드빌, 가데스 바네아와 온 고센 땅까지 전쟁을 치르면서 모두 정복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42)"라고 표현되는 역사였습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싸우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일단의 전쟁이 마쳐지자 온 이스라엘과 여호수아가 길갈 진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은 패함이 없음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전쟁의 역사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군대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의 역사입니다.오늘은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42)"라는 말씀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전쟁과 하나님의 전쟁의 큰 차이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기를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과 족속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이들을 밀어내셨습니다. 언약 백성이 차지할 땅에 다른 족속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차지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어둠 자녀들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차지한다면 몰아내야 합니다. 이런 성전 청결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말씀이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성취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에게 이 시대의 교회라는 언약의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언약의 땅의 성스러움이 교회에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종교가 교회를 장악하기도 하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점령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십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충만하고 순종하는 곳이 되면, 이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정화시키며 청결의 역사를 세워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임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의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그대로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날을 고대합니다.기도사랑과 자비의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새롭게 하시는 모습을 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먼저 교회가 성결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말씀에 순종을 이루는 충만을 이루게 하옵소서. 그리하여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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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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