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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 트랙제로 3월 ‘이달의 아티스트’ 선정 ‘노래하는 목사’ 황푸하
    [사진제공=멜론] 싱어송라이터 황푸하가 ‘노래하는 목사’라는 독특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과 자신만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털어놓는다.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은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를 통해 3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싱어송라이터 황푸하와 함께 한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들을 2일 오전 10시30분 멜론 스테이션에서 공개한다. 포크 뮤지션인 황푸하는 이날 멜론 스테이션 ‘트랙제로’ 초대석에 출연해 ‘노래하는 목사’가 된 비하인드 스토리, 이름에 담긴 뜻,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 숨은 명곡 플레이리스트 등을 전한다. 이어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이자 출애굽기(Exodus)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담은 앨범 ‘두 얼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며 리스너들과 소통할 예정이다.신앙 생활과 음악 두가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푸하는 “아름다움, 사랑 등이 ‘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노래’가 신을 볼 수 있는 창문인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철학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이와 함께 황푸하가 지금까지 발매한 명곡들을 담은 ‘트랙제로’ 플레이리스트도 멜론에 이날 공개된다. ‘첫 마음’, ‘칼라가 없는 새벽’을 비롯해 김사월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멀미’ 등 총 15트랙의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들은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뿐만 아니라 황푸하는 ‘멜론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세번째 앨범 ‘두 얼굴’을 통해 파격적인 도전을 하게 된 이유와 에피소드 등을 밝히고, ‘아름다움’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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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축복의 회복을 위하여(학개 2:10-19)"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성 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 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0-19)“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 제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했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과 장정들과 기술자 등 많은 유다 인 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십 년 세월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처럼 우상(偶像)을 숭배하며, 온갖 악행(惡行)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20). 그런데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 제국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 인 포로들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역사(役事)였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역대하 36:21-23).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유다 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회복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건자재를 구입하고 필요한 인부들을 고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지 이년 두 달 만에 예루살렘성전 재건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방해하는 주위의 적들 때문에 겨우 <전 지대공사(殿地臺工事)>만을 마친 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시들어지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정도 같이 시들어 들었고, 그들은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전건축을 계속 미뤘습니다. 그러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인들은 하나같이 재산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화려한 저택을 지어 기거하며 쌓은 부를 과시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이전의 신앙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목표로 했던 신앙공동체의 삶이 이제는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삶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적 습관은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외적의 침입과,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그 형편이 말할 수 없이 궁핍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자청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같은 가난과 궁핍의 원인을 알지 못한 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셨고,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전복구공사를 재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어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개 1:9-11)“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인본주의적 신앙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학개 1: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과, 그 결과로 그 많은 재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 닥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했고, 이전처럼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의 재산을 드리고,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신앙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중심주의 삶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다시 임 재하셨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로다! (학개 2:4)“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축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1:12)“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되고 범사가 잘 됩니다. 우리에게서 상실된 축복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상실된 신앙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신본주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의 삶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기에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이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신본주의의(神本主義) 삶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 되고 하나님께 소유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기에 신본주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고 다시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9-10)“ (3) 죄를 멀리하는 삶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1-14)“ (4)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입니다(마태복음 22:37-40,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5)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옛날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궁궐을 짓고,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궁궐 밑에 감옥을 지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럽의 구질서는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개척시대의 청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예배당을 지었고, 다음으로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신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에 의거한 미국의 가치관과 미국의 시민정신이 근대 문명사회의 확립을 위한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는 43세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 때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락도 즐기지 않았고,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만이 그의 취미였고, 사업확장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미국 내 동종사업자들을 무자비하게 파산시켜 모두 그의 회사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석유사업의 95퍼센트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그에게는 악덕기업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한 교회에 거금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을 때,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고 선언하며, 그 기부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10만 달러는 참으로 거금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그의 나이 53세 때,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바로 그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몸에 악성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빠져나갔습니다. 식사 때 마다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까지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 불안함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쁨과, 행복감을 상실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갔습니다. 록펠러를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1년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그를 미워하는 언론사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미리 작성해놓고, 그의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자답게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재산을 교회와, 사회 복지시설과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또 인류의 복리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식량, 인구, 의학,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활동>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재산관리인들에 의해서 문서에 작성된 용도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발명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연 기적의 약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위해서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이 이처럼 다방면으로 인류복리를 위해 쓰이게 될 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악으로 치닫던 그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정상적으로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무표정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가 일년도 못살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후 45년을 더 살며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신자인 그가 탐욕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고, 그와 함께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9)“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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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5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사도행전 15:30-41)"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수일 후 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 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 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35-41)“ 1.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4-26)“ <안디옥>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시>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 째로 큰 대도시였습 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오십 만 가량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으로 피신을 가 그곳에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유대인>들만의 교회였 다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이라는 벽을 허물고 편견 없이 모두를 품는 <이방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 없는 안디옥 교회가 날로 부흥되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이끌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하에 안디옥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고,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안디옥 교회에 이제는 함께 이끌어줄 <동역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그가 오래 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나 잠시 교류했던 <다소> 지방의 <사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소>는 오늘날의 <터기>의 남부지방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울은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에 열심인 자로서,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도록 사주하는 등, 그의 과거의 악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의 기피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진정을 이해하고 포용해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으로 사울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아량과 덕이 많은 <야고보 사도>에게 소개시켰습니다(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 -19).그럼에도 사울은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곧 바로 고향 다소로 돌아가야 했고, 사울의 가치를 알아봤던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도행전 9:26-30).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안목은 적중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 했으며, 사울의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는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자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전도>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의 지시 에 따라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울의 탁월한 <전도의 능력>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 행전 9:15-16)“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방인 교인>들도 <유대인 교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 를 받아 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교란시켰습니다. 이 문제로 이들과 크게 다투며 논쟁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의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의 보고를 기뻐한 예루 살렘 교회 지도부는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즉시로 <지도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교회공동체> 안에 더 이상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각 <지 교회>에 내려 보내는 편지로 작성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먼저 가장 큰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전달을 위해 안디옥으로 귀환을 했고, 이로써 그들의 전도여행도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5:1-35).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재개했습니다만,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지 교회들>이 생각나,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위한 <팀 구성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고, 각각 다른 길로 떠나버립니다. <의견대립의 원인>은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떠난 전도단의 멤버였었는데, <전도사역의 효용성>에 회의를 품은 그는 <밤빌리아>에서 그들 일행과 결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때의 일로 그에게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단호하고 엄격했던 바울 사도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가의 일로 크게 다툰 후 결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제각기 따로 전도단을 구성해서 떠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향해 떠났습니다. 구브로를 <헬라어>로 <쿠프로스(κύπρ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구리>입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리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퍼(Kupper)>, 영어의 <코퍼(Copper) >는 헬라어 <쿠프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브로가 지금의 <키프러스(Cyprus)>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의견차이>로 <결별>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그들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27-28)“ 비록 1차 전도여행으로 유명해진 바울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바나바의 배려로 2차 전도여행에 합류 한 젊은 마가는 바나바의 감화력과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성장하였는데, <신약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로 그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후 다른 기록자들이 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상호보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그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부했던 마가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뒤늦게 그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해준 것이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4:11)“ 그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라도 그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알린 것입니다. 열정만 앞섰지 다듬어지지 못한 마가를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것은, 다름아닌 바나바 의 <사랑과 인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재의 모습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라(Silas)>를 2차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와 교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실라와의 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소아시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성령께서는 도중에 소아시아로 향하 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6-10). <마게도냐>에서 첫번 째로 당도한 성이 <빌립보>였는데, 이곳에서의 <실라>의 역할은 아주 유용했습 니다. 첫째는 그가 마게도냐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로마황제에게 충성했던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의 주민들>에게는 <식민지 거주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언어와 신분 상으로 그들과 대등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라는 여러 면에서 <유럽 선교>에 매우 적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로마서 8:27-28) 4. <인간의 의지> 가운데 <동역(同役)>하시는 하나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신학용어(神學用語)> 가운데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류(同流)>라는 뜻인데 '서로 돕다‘, '협력하다‘를 의미하는 <concur>의 명사형입니다. 이 <동류(concurence)>는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작용>되어,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는 당시 본인들이 깨닫지는 못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학교이지만 1924년경만 해도 이 학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쉐퍼 박사> 바로 옆에서 기도하든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문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닙니까? 그 가축들 중에서 얼마를 팔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가 그 돈으로 이 학교의 빚을 다 갚고, 계속하여 학생들을 양육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에 가축을 가득 싣고 가서 다 팔았습니다. 저는 원래 이 돈을 다른데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이 돈을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니 받아 주십시요! “ 사무실 여자 직원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즉시로 학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여직원으로부터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로 보내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이 목장주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달라스 신학교의 문제해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목장주의 의지>에 그대로 <작용> 한 결과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당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동역(同役)>해주시는 축복된 신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아멘! >
    • 종교
    2023-02-09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후포스타시스’ – 실상과 증거를 가진 믿음”
    [성경/365산업경제뉴스DB] 2005년 5월 31일 새벽 3시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시고 벽시계로부터 흡사 레이저 광선처럼 내 이마 한 중앙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쏘아주셨다. 한 달 후에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영어로 ‘Faith Test’- 믿음 시험이라는 음성이 쑥 찔러졌다. 결국 성령받은 지 33년 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세월이 믿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러했던 것을 알게 하셨고, 이제부터 믿음 시험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들려온 음성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며 댓가를 치르는 희생을 감내하며 이번 5월이면 만 18년이 되는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최종관문인 지금의 오래참음과 인내의 자리까지 따라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 인내의 결과는 이제 약속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5). 처음에 보여주신 천 개의 퍼즐이 맞혀져 그림이 완성되듯이, 믿음-순종-희생-인내의 긴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제 약속의 땅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믿으면” 하고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을 보는 것이며, 풍부함과 풍성한 재정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그동안의 기름부으심을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나라들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부흥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적 계시로 그가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어 믿고 선포하면 현실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하리운에 오래 같이 해 온 분들에게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이번 소드 3년차 ‘조명된 혼과 감취인 것” 질문의 답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 예언에 비추어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때에 그가 하실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나가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2주 전, 혹은 1주 전 말씀하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하셨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번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며 묻고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음으로 묻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일이 패턴화 된 실상과 증거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매 번 같이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주세요” 하고 응답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치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선입견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어떤 일을 주님이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100%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음성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의 리콜운동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그러한 패턴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 가면 “불이 있을 것이다. 통곡이 있을 것이다” 하셨을 때, 나가기 전에 미리 글로 선포하면 그런 일들이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코비드 19이 기승을 부려 나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때인 2020년 5월 “이번에 나가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만남을 통해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고, 아내에게 그해 11월 “이번에 20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신 집회 전 정확히 20명이 들어오고 난 후, 핸폰이 깨어져 연락을 더 못받게 하셨으며, 그후 “더 들어올 것이다” 하신 대로 집회 중 기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 등, 수없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처음 참석한 두 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하고 예언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강력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목요일 소드 3년차에 다룰 초대교회가 가르친 믿음의 헬라어 원어 중 ‘후포스타시스’ 믿음인 것이다. “‘후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예감하고 여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소유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없이 믿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시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일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시는 것이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 주님께서 어제 새벽에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사업하는 한 여집사님에게서 그 전날 전화로 사업체 매각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해와 기도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하리운 밴드에 500명이 있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제 에베드 전도사님이 이미 밴드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가입시켜 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와 가입시켜 준 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전화하고 올 사람이 천 명이다” 하셨고, 이번 천 명 여자 목사들을 시작으로 이전부터 “30명이 준비되면 군대가 온다, 2천, 4천이 온다. 풍성한 재정이 올 것이다”의 실현인 것이다. ***보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다. 그들은 열매를 누리는 선두주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듣고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 눈에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이다. 아직 자아가 굴복되지 않았고 주님과 진리보다, 주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일과 사역이 더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일이 많아서, 사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과연 하나님의 일을 두고 무엇이 바쁘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는 아니다 그래서 구분된다 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셨다. 그동안 1년 넘게 하리운에 몸담은 분들은 막연히 바라는 그런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제 그 믿음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리운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시대적/전국적/세계적 부흥의 영광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다!” “내 일처럼, 내 가정 일처럼, 내 사업하는 것 처럼 하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믿는 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대로 순번이 정해지고 있다. 땡큐 로드. 크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종교
    2023-02-08
  • [오늘의 말씀]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1:1∼4)"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1] <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2] 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3]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4] <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5] 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6] <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7] 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8]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9] 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
    • 종교
    2023-02-04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격려하고 들어주고 위로해 주라”
    [365사업경제뉴스DB] 오늘 이곳 토요일 새벽에 “마음에는 안들고 그것 밖에 못하나?” 생각하지 말고, 그 수준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라 하셨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그 정도 밖에 못하나? 그러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좋은 교사는 같은 연령대라도 다 발달 정도가 다르니 잘하는 학생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있는 수준에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어 더 나은 성적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장이나 숙제 검사에 웃는 그림과 함께 “참 잘했아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칭찬하면 좀 부족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격려는 가능성을 더욱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폴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시련은 더욱 단단하게 하는 단련, 그리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준에서 잘한다 칭찬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성장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우리 하리운 회원 한 분을 보여 주시면서 어려웠던 때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라. 치료해 주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날에 대한 기억의 깊은 내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상처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하셨다. 내적치유 훈련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지만, 같이 모여 있어 치유를 위한 실제 사역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론은 알지만 아직 치유받지 못한 감정 치유와 참된 용서를 통한 자유함을 얻도록 도움을 주라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배웠고 또한 “회개했다, 용서했다, 내적치유를 많이 받아 봤다” 하면서도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이 실제 믿음이 되기 전에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아직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 종으로 팔려가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 없이 인내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고난 속에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해를 선으로 바꾸셨다” 고백하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후대한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내적치유는 상한 마음의 치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치유하시고 우리의 뿔(권세)을 높이셔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로 쓰시기 원하신다. 주의 행사(하시는 일)를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주를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2). 시편 92:4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편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삶의 목적과 사명을 알도록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종교
    2023-02-03

실시간 종교 기사

  •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오직, 주님과 주님의 능력만 신뢰하는 믿음'
    <오직, 주님과 주님의 능력만 신뢰하는 믿음> 우리들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그런 믿음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힘은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완전해집니다. 우리가 힘이 없을수록(이것은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이 더 잘 나타납니다. 우리의 힘은 결코 주님과 협력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에 주님의 힘을 보강하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패배와 수치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신뢰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이 믿음은 우리가 약할 때뿐만 아니라 강할 때에도 행사해야 합니다. 현재 자기의 건강을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다시 연약해질 때까지는 이런 경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선천적으로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옛사람 안에서 받은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는 성도라면, 자신의 몸이 건강하고 주님의 생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힘을 받기 위해 자신의 힘을 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뜻대로 연약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신뢰하지 않듯이 자신의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 주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는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배운 자들은 타고난 힘을 근거로해서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배운 자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이상의 월권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본래 약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도 같이 그렇게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님의 힘을 공급받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연약했던 그런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일하지 않고 경솔하게 해동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에서는 "자아"가 성령에 의해 갇힌 바 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진정으로 사모하지만, 자신의 힘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타인의 칭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몸은 결국 쇠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뜻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힘도 공급되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자신의 일을 도모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생명이 새어 나가고 우리의 연약한 몸이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살기 위해서는 주제넘는 일은 금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움직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순종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반항하도록 그의 힘을 주실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그의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 종교
    2022-04-20
  • 품는교회 김영한 목사,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북리뷰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저자는 글을 쓸 때, 기피해야 할 내용을 잘 정리해 준다. 1. ‘적’, ‘의’를 보이는 ‘것’,‘들’ 적, 의, 것, 들, 이런 군두더기 표현을 피하라고 한다. 이런 잡초를 뽑을 때, 글은 더 꽃 피운다고 말한다. ex 1) ‘적’ 사회적 현상, 경제적 문제, 정치적 세력, 국제적 관계 -> 사회 현상, 경제 문제, 정치 세력, 국제 관계 ex 2) ‘의’ 문제의 해결, 음악 취향의 형성, 노조 지도부와의 협력 -> 문제 해결, 음악 취향 형성, 노조 지도부와 협력 ex 3)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 ->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ex 4) '들‘ 사과나무들에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2.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 - ‘있다’는 동사이기도 하고, 형용사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표현은 진부하게 된다고 한다. ex 1) ‘있는’ 멸치는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 -> 멸치는 바싹 마른 상태였다. ex 2) ‘않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 우리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ex 3)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 그에게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ex) 4) ‘하는 데 있어’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비용이다. -> 그 문제를 다룰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비용이다. 3.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 저자는 ~에 대한, ~대해, 이런 표현이 오히려 게을러 보인다고 한다. ex 1) ~에 대해 그 문제에 대해 나도 책임이 있다. -> 그 문에 나도 책임이 있다. ex 2) ~에 대한 사랑에 대한 배신 -> 사랑에 배신 ex 3) ~들 중 한 사람, ~들 중 하나, ~들 중 어떤 그녀는 전형적인 독일 여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 그녀는 전형적인 독일 여자였다. ex 4) ~같은 경우 ‘나 같은 경우에는’, ‘중국 같은 경우는’, ‘그 같은 경우에’라는 표현 보다 -> ‘내 경우에는’, ‘중국 경우는’, ‘그 경우에’로 짧게 쓰라고 한다. 4. 내 문장은 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자는 ‘~에’를 ‘~으로’ 바꿔 쓰면 좋을 때가 있고, 반대로, ‘~로’를 ‘에’로 변경해야 좋을 때가 있다고 한다. ex 1) ‘~에’를 ‘~로’ 변경 이번 추석엔 고향에 갈 수 없다. -> 이번 추석엔 고향으로 갈 수 없다. ex 2) ‘로’를 ‘~에’ 변경 여기저기 지하수로 젖어 있는 회색 암벽들 -> 여기저기 지하수에 젖어 있는 회색 암벽들 ex 3) ‘를’을 ‘에’로 변경 자식이 명문대를 가는 게 꿈인 부모들 -> 자식이 명문대에 가는 게 꿈인 부모들 ex 4) ‘~에’, ‘~에게’, ‘에게서’를 잘못 쓴 문장 적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다. -> 적국에 선전 포고를 하다.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바뀐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 우리는 정부는 미국에 바뀐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적발되다. -> 업자에게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적발되다. ex 5) ‘~로’, ‘~로 부터’를 ‘에게’, ‘에서’로 변경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내전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난민들 -> 내전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들 ex 6) ‘~로 부터’를 ‘~를 통해’로 변경 몇몇 죄수들이 담 한쪽에 난 구멍으로부터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 몇몇 죄수들이 담 한쪽에 난 구멍을 통해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5. 당하고 시키는 말로 뒤덮인 문장 저자는 동사를 사용할 때, 피동 혹 사동으로 사용하는데, 피동 혹 사동으로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ex 1) 피동의 예 그러다가 언젠가는 크게 데일 날이 있을 거야. -> 그러다가 언젠가는 크게 델 날이 있을 거야 ex 2) 사동의 예 휴가가 너무 기다려진다. -> 휴가를 손꼽아 기다린다. ex 2) 두 번 당하는 말 둘로 나뉘어진 조국 -> 둘로 나뉜 조국 12월이 되면, 시민들의 관심이 불우 이웃에게 모아진다 -> 12월이 되면, 시민들의 관심이 불우 이웃에게 모인다. ex 3) ‘~시키다’라는 표현 문제를 야기시킨 학생들 모두 정학 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 문제를 야기한 학생들 모두 정학 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 4) 사물을 능동을 넘어 극존칭 주문하신 커피가 나오셨습니다. ->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저자는 문장을 잘 다듬으라고 한다. 특히, 주어와 술어를 그리고 문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게 하라고 조언한다. 대부분 글을 쓰다 보면, 생각한 바를 마구 풀어낸다. 이런 글은 정리가 안 되어, 머리가 아프다. 자신만 아는 흐름의 글은 독자를 힘들게 한다. 글을 해독해야 할 글은 독자에게 독이 된다. 조금 더 짧게, 명확하게, 의식의 흐름에 질서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 종교
    2022-04-13
  • 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오은영 박사의 방송이 갈수록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아이와 부모 상담에서, 성인과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까지. 왜 이렇게 오 박사를 찾을까? 물끄러미 그녀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이야기 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의 표정, 시선, 말을 시작하는 첫 마디는 깊은 해아림과 공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때 사람들은 금새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다. 나는 본래 간헐적 외사시다. 복시가 심해서, 글자를 보거나 무언가를 집중해서 볼 때 한 눈으로 보는게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종종 나머지 한 쪽 눈이 바깥쪽으로 향할 때가 있다. 어릴 적 수술을 했지만, 완전하게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 앞에서 고개를 숙여 글자를 읽는 순간이 곤욕이니, 설교자의 자리는 더욱 더 부담이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초록눈망울이라는 카페를 통해서, 나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이 분야의 가장 권위가 있는 의사를 알게 되었고, 예약하고 두 달 만에 진료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내 눈은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로도 되었다. 의사분께서 자상한 미소와 깊은 해아림으로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공감해주었고, 고생 많았을 거라고 이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료해줄 수 없는 상태여서 미안하다는 말도 해주었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날 고쳐준 것은 아닌데, 내 마음을 해아려주어서, 내 마음을 공감해주어서 힘을 얻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내 눈과 관련된 문제를 고치려고 하거나, 그 문제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았다. 그 날 그곳에서 내 마음은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두 눈을 가지고도 한 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세상을 두 개로 보지만 한 분 하나님을 알아보았다. 그거면 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정리가 끝났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게 목회자의 일상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니,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쉽게 호감이 가는 사람은, 나와 살아온 환경이 닮은 사람이고, 무언가 거부감이 생기는 사람은, 나와는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난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차이, 불편함과 호감의 이유는. 그래서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나의 경험 지도로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 듣고 해아려보고, 살아온 삶의 배경을 듣는 관계까지 가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그 사람의 모습과 생각이 있다. 그렇게 보면, 이해 못할 인생도 없고, 이유 없는 행동도 없다. 그저 들어보지 않아서, 더 깊이 해아려보지 않아서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기에는 세상에 귀하지 않은 인생이 없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그 사람의 인생을 들어보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야 한다. 그래야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그를 누릴 수 있다. 인생은 수많은 지도를 그려가는 시간이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이 시간들이 참 감사하다.
    • 종교
    2022-04-08
  •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
    <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나의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나의 가족을 지켜주시옵소서. 나의 딸과 아들들 그리고 내 사위와 내 손주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를 지켜 주시고 나의 교우들과 동역자들 그리고 나에게 후한 호의를 베풀었던 나의 모든 지인들을 붙들어주시고 지켜주시옵소서. 이밤에도 주의 천사들을 보내어 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들을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코로나는 물론, 모든 전염병에서 건져주시옵소서. 밤에 찿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에 닥쳐오는 모든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여... 주의 권능의 팔을 저들에게 펼치시옵소서. 치유와 회복의 능력으로 함께하시옵소서. 이 밤에도 주의 깃으로 저들을 덮으시고 주의 진실함으로 저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몰아내시옵소서. 악성 바이러스들을 몰아내시옵소서. 저들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시옵소서. 음란, 폭력, 과식, 게으름, 분노, 혈기를 몰아내시옵소서. 탐심, 교만, 허영, 질투, 자만도 몰아내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들이 일일히 열거하지 못하는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모두 몰아내시옵소서. 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주의 진리로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거룩하게 지켜주시옵소서. 각종 바이러스는 물론, 재난과 환란 그리고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저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저들도 내 안에 있고 나도 저들 안에 있나이다.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의 진리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의 거룩함과 영광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오, 나의 주님... 우리들은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통해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지키시므로 악한 자들이 우리들을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들을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들의 모든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낮의 해도 저들을 해치지 못하고, 밤의 달도 우리들을 해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 주님...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모든 악한 것들을 향해 외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 악하고 더러운 것들아~ 내가 네게 엄히 꾸짖어 명령하니 썩 물러갈지니라!" "권능의 주, 능력의 주, 영광의 주, 부활의 주, 생명의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를 향해 엄히 꾸짖어 명령하니 떠날지어다!" "지금 당장 손을 떼고 떠날지어다!" "그리고 다시는 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도 말지어다!" "얼씬도 거리지 말지어다!“ 오, 주님... 선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종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나의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온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왕의 왕이시며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죽은 자와 앞으로 죽을 모든 자들의 부활되고 우리들의 생명이 되십니다!" 오, 참된 나의 주님이시여... "주님은 죄인들의 중보요 멸망자들의 구원이십니다!" "약한 자의 강함이 되고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모든 이들의 고침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평화요, 우리들의 기쁨이십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의 위로가 되시고, 없는 자들의 풍성이 되시고,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들의 놓임이 되십니다!“ 오, 나의 자비로우신 아버지여... 오늘도 우리들의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우리들을 높은 바위 위에 우뚝 세우시옵소서. 우리들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고, 우리들의 팔이 놋 활을 당기어 원수의 심장을 겨누게 하옵소서. 오, 나의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두가 용사가 되게 하옵소서. 강한 용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들 모두가 주님을 의지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게 하시고, 우리들이 주님과 더불어 높은 담도 뛰어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 주님... "주님이 우리들의 참된 피난처요 요새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들이 의지할 강력한 반석이요 견고한 성읍이십니다!“ 오, 주님... 친히 우리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주님이 친히 우리들의 손 방패가 되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옵소서.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주시옵소서. 오, 주님... 천 명이 우리들의 오른 쪽에서 넘어지고, 만 명이 우리들의 오른 쪽에서 엎드러집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들은 이미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존하신 주님이 우리들이 영원히 거할 우리들의 거처이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우리들이 안전히 거할 우리들의 피난처이십니다. 오, 주님... 우리가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이제 더 간절히 부르짖어 구합니다. 들으소서! 친히 일어나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소서!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치유하시고 회복하소서. 담대히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일어나겠나이다. 만물들아, 들으라! 주께서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하니 그가 나를 건지시는도다! 만물들아, 들으라! 그가 나를 알고 내가 그를 안즉 모든 재난과 환란과 질병이 나를 비켜 가리라! 우리가 환란 당할 때에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주께서 우리를 건지시고 영회롭게 할 것이니라. 우리들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며 영원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아멘.
    • 종교
    2022-03-25
  • 브레드하우스 대표 박길웅 목사, '사회성 결여'
    1.페이스북은 지난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복된 기반이 되어 주었다.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같은 주제 아래 모일 수 있었고, 관심사만 맞다면 얼마든지 연합할 수 있는 터가 되었다. 2.그런데 최근 몇 년간 페이스북 내의 모임의 농도가 짙어지며 흔히 말하는 파벌.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이 되었다. 계파가 만들어지고 끼리끼리의 색은 더 진해졌으며, 수용과 포용보다는 찍어 누르기와 비난과 조롱이 더 빛을 발해가는 것을 본다. 3.지난 9년간 선교지에서 있으면서 20대 중후반의 비교적 젊고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회성 결여'였다. 흔히 말해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고 가지는 감정들에 공감 능력이 한참 뒤떨어졌다. 4.선교지에 동떨어져 있는 동안 어쩔 수 없다지만, 좁은 시내만 바라보며 물을 긷다 그것이 바다였노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한국에서 다시 5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또 선교지를 향해 나아가며 사실 염려되는 부분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이 부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지 않는 것. 5.물론 한국에 머물러 살면서도 자신이 바라보는 페이스북 게시물이 전부라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나, 혹은 자신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전부인것 마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조금 더 넓고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6.여전히 좁은 우물에 갇혀 허우적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손을 내미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손을 뻗쳐 그 우물 밖을 내어다 볼 용기가 있다. 7.겸손하게 타인을 존중하되 자신의 색은 잃지 않고, 강렬하게 주장을 하다가도 틀렸음을 발견하면 기꺼이 무릎 꿇을 줄 아는 사람. 내가 속하고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더 큰 세상과 무리가 있음을 늘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는 넓고 큰 사람이 되기를.
    • 종교
    2022-03-23
  • Pope visits young Ukrainian war refugees in Rome hospital
    [Pope Francis visits the Bambino Gesu Children's Hospital in Rome on Mar 19, 2022, to thank staff for caring for Ukrainian children who fled the Russian invasion of Ukraine. Since the beginning of the conflict, the hospital has taken care of about 50 Ukrainian children. (Photo by= Reuters/Vatican Media handout)] ROME: Pope Francis on Saturday (Mar 19) made a surprise visit to young Ukrainian war refugees being treated in a pediatric hospital in Rome. One of the pictures released by the Vatican showed the pope talking to a girl with a fully bandaged head and what appeared to be a tube in her throat, Photo by= Reuters) Nineteen Ukrainian children are currently being treated at the two branches of the Bambino Gesu hospital for cancer, neurological conditions or serious war injuries caused by explosions, the Vatican said. About 50 children from Ukraine have been treated at the hospital since the war began. "The blood and tears of children, the suffering of women and men who are defending their land or fleeing from bombardments shakes our conscience," Francis said in a message to a Church conference in Slovakia on Friday.
    • 종교
    2022-03-21
  • 스위스 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거듭남의 진리'
    거듭남의 진리(요한복음 3:1-1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共生涯)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하시며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고,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행하신 이적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산 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던 <니고데모>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그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이적들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5절). 더 큰 <이적과 기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1.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 중생(重生) ‚거듭난다‘는 말을 헬라어로 <아노덴(ἄνωθεν)>이라고 하는데, <중생> 곧 <위로부터 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중생(重生)의 은총>을 덧입은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참 신자> 는 바로 이 <중생의 은혜>로 <거듭난 신자>입니다. 따라서 <참 신자>에게는 부모로부터 말미암은 <육적 생명>이 있고,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2. 거듭나는 방법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습니까? “ <니고데모>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보다 확실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예수님 말씀처럼 <구원받은 신자>는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입니다. 첫 번째는 부정모혈(父精母血)에 의해서 육 적으로 태어나고, 그리고 두 번째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입니다. <물과 성령>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물세례>는 <지상교회>가 주는 <세례>요,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세례>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자신의 <죄와 불신앙>을 깨닫고, <구원의 은총>을 위해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신자에게 <물세례>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에 따르는 <교회>의 <공적 의식절차>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그리고 회개와, 신앙고백과, 물세례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세례>입니다. 하지만 허다한 경우에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주어지기도 하고,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회개>와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사도행전 2:38)“ 이탈리아에 가면 <발덴시안>이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창립한 <페터 왈도(Peter Waldo(라틴:Petrus Waldus, Valdus, 1140 –1205)>는 중세 시대 사람인데,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저녁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진탕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중 가까운 친구 하나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호화로운 연락(宴樂)의 장소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페터 왈도>는 이 충격적 사건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인생의 깊은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지난 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한 그는 믿음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고, 자나깨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경건생활에 몰두했습니다. 이렇게 <탕자 페터 왈도>가 변화를 받아 위대한 <성자 페터 왈도>가 되었습니다. 3. 거듭남의 결과 바람을 볼 수 없지만 감지할 수 있듯이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주안에서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영성(靈性)>이 열려 무시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주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삶>,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항상 깨어 기도하며, 기쁨으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기도응답이 있으며, 도우시며, 인도해 주시며,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로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새 생명의 삶>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1)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2)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12:3)“ (3)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 8:16-17)“ (4) <성령께 소유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16)“ (나) 성도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다) 성도 위해 중보기도(中保祈禱)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6-27)“ (5)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1)“ <로마 제국>의 기독교인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죽고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재위: 361-363)>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마드니우스(Madnius)>라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정통한 한 <고트족 노예>의 양육을 받고 자란 그는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심취한 <신 플라톤주의> 철학자가 되었으며, 그리스어로 쓰인 몇 편의 철학적 사변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난해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인 행세를 했지만, 황제가 된 다음에는 배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임 콘스탄티누스 황제 1세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2세의의 정책을 뒤엎는 반 기독교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교자 율리아누스(I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재위 3년째 되던 해인 주후 363년, 그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 원정(遠征)>을 가서 페르시아 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군대가 전장(戰場)을 향하여 행군해 갈 때에, 그의 병사들 가운데 믿지 않는 병사들이 예수를 잘 믿는 한 병사에게 비웃는 태도로 물었습니다. "네가 믿는 목수 노릇을 하던 그 주(主)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같은 동료 병사들의 조롱 섞인 질문에 그 신실한 그리스도인 병사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분이야 목수시니까 목수 일을 하시겠지요! 아마 당신 왕의 관을 짜고 계실거요!" 그의 병사들간에 이 같은 대화가 있은 며칠 후 <율리아누스 황제>는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심한 부상을 당했고, 그를 살리려는 수행의사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페르시아 군의 기습공격에 채 갑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전투에 나선 그의 복부를 한 <기독교인 병사>가 창으로 찔렀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결국 당신이 승리했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의 배교행위(背敎行爲)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불신자들과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와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11-15)“ 그런 다음 만 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구원> 받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영화로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불신자>들은 늦기 전에 자신들의 <죄와 불신앙을 회개>하고, <주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린도전서15: 50-5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1-4)“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아멘! >
    • 종교
    2022-03-16
  • KEEN Ministry Coordinator 정서영 선교사, '선물'
    민수기 18장 5.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You are to be responsible for the care of the sanctuary and the altar, so that my wrath will not fall on the Israelites again. 6.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I myself have selected your fellow Levites from among the Israelites as a gift to you, dedicated to the LORD to do the work at the tent of meeting. 7.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 But only you and your sons may serve as priests in connection with everything at the altar and inside the curtain. I am giving you the service of the priesthood as a gift. Anyone else who comes near the sanctuary is to be put to death.” I am giving you the service of the priesthood as a gift.(6, 7)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부분에서는 과연 이걸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맡겨진 일과 책임이 막중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 아닌가? 사명? 말 그대로 목숨걸고 해도 감당하기 벅찬 일인데 이것을 선물이라 하신다. 사실 생각해보면 선물이라는 것이 받는 이에게 선물인지 아닌지 중요하면서도 주는 이의 심정과 전달의 의미도 중요하다. 주고 싶지 않은 것을 선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직분을 주시고 싶어 하셨을까?를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선물로 제사장 직분을 주신 이유. 그것은 제사장이 감당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될 일이다. 쉽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 째는백성들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 째는 바로 제사장 직분을 맡은 자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 말할 수 있다. 둘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삼기 위함이심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물. 선물이 맞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를 살리심도 선물이고 그렇게 하신 이유도 당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삼기 위함이라 하시니 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이 땅에 살면서 죄인으로 살지 않는 기쁨과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과 권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큰 선물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가끔씩 받는 이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하거나 세상적 기준으로 이해하려 할 때는 선물이 아니라 무거운 십자가, 족쇄, 책임, 사명 등으로 받아드려 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이란 단어와는 참 어감부터가 다르다. 오늘 하루도 주께서 원하셔서 주께서 허락하신 이 선물과 같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나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종교
    2022-03-16
  • 다니엘미션미니스트리 오준섭 선교사, '지도자의 판단력'
    1.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한 당시의 모습과 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끔찍한 사진이었습니다. 2. 일본은 세계를 향해 전쟁을 일으킨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점령해 우리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일으킨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 나라는 둘로 쪼개지고 역사가 왜곡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로 인해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살아가고 있고 이념 전쟁에 시달려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일본 국민은 과연 행복했는가?” 한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그 나라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이 제한되고 자유도 잃으며 삶은 피폐해집니다. 일본 국민은 핵폭탄에 희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4.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 그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도탄에 빠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5.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민 역시 힘든 삶을 견뎌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군가는 죽고, 그 누군가의 가족은 슬픔에 빠집니다. 자식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6. 아울러 전쟁을 통해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랫동안 전쟁의 후유증을 겪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7. 한 나라 지도자의 판단력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의 판단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지도자나, 전쟁에 침공당한 나라의 지도자나 그 나라의 백성의 희생이 수반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8. 대선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안전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좋은 지도자를 위해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가 더욱 부강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빌립보서 2장 13절 -
    • 종교
    2022-03-05
  • 기독교신앙회복연구소 대표 김완섭 목사,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책 이야기 2 - 책 속에서 너무 십자가의 의미를 중심으로 제목을 정한 것 같습니다. 골고다로 가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십자가를 지고 말이죠. 그러나 이 책은 주님께서 지셨을 법한 무게와 크기의 십자가를 직접 체험해본 이야기입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한 번 져봤다고 해서 공로도 아니고 자랑도 될 수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제가 특별한 체험을 한 이유는 순전히 저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나의 변화를 위해서였습니다. 경험을 통한 신앙의식의 깨우침 없이는 변화가 어렵습니다. 저의 모든 체험과 집필활동들은 오직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의식의 변화를 통한 목회자의 변화, 성도의변화, 교회의 변화입니다. 그 길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꼭 읽어보시고 도전을 받으심으로써 변화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되지 않아도 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동일하다. “바라바가 자기 대신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도록 했다면 저 역시 저 대신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라바가 자기 욕심을 따라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이었다면 저도 똑같이 저의 욕심을 따라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라바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면 저 역시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라바와 저는 똑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라바 대신 지셔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는 500kg이어야 하고 저 대신 지셔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는 10kg쯤 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바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무게와 저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치유사역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시고서야 돌아가셨습니다. 고통으로 점철된 죽음의 모든 과정을 전부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고통의 의미가 곧 치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든 고통은 인간의 고통을 대신 하신 것인데, 예수님의 그 고통을 소유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치유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시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양손과 발목에 못을 박히는 그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바로 신앙인의 치유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치유라는 표현은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영역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치유사역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다 치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당했던 모든 고통과 아픔은 예수님의 그 고통 속으로 저절로 스며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극심한 고통도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그 고통을 체험하면 자연스럽게 다 치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기도문과 가상칠언 "이렇게 주기도문과 가상칠언을 대입해 나간다면 더욱 정확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상칠언은 주기도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도였습니다. 비록 순서까지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내용들을 극심한 고통 중에서 펼쳐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로마의 사형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성취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보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조금이라도 깊이 있는 교제를 위하여 성령님께서 이런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완전합니다. 일부러 보충하라고 남겨놓으신 고난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자는 왕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왕을 대신하여 싸우는 병사에게 주어진 역할과도 같다고 말합니다. 왕이 직접 적군과 싸울 수는 없으므로 왕이 당해야 할 일을 병사들이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싸우셨던 싸움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상에서 싸우고 있는 성도들의 삶의 이치와 같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또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큰 성을 침략한 적군과 전쟁이 벌어졌는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분명히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무너진 성벽이며 부러진 무기들이나 불에 탄 주택들이 저절로 재건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더라도 부서진 성벽을 중수하고 재건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은 고난의 이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증인 "십자가의 증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부활의 증인인 것은 틀림이 없고 또 그런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기 위해 항상 십자가를 증거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부활의 증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십자가의 증인에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 종교
    20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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