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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 트랙제로 3월 ‘이달의 아티스트’ 선정 ‘노래하는 목사’ 황푸하
    [사진제공=멜론] 싱어송라이터 황푸하가 ‘노래하는 목사’라는 독특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과 자신만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털어놓는다.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은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를 통해 3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싱어송라이터 황푸하와 함께 한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들을 2일 오전 10시30분 멜론 스테이션에서 공개한다. 포크 뮤지션인 황푸하는 이날 멜론 스테이션 ‘트랙제로’ 초대석에 출연해 ‘노래하는 목사’가 된 비하인드 스토리, 이름에 담긴 뜻,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 숨은 명곡 플레이리스트 등을 전한다. 이어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이자 출애굽기(Exodus)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담은 앨범 ‘두 얼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며 리스너들과 소통할 예정이다.신앙 생활과 음악 두가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푸하는 “아름다움, 사랑 등이 ‘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노래’가 신을 볼 수 있는 창문인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철학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이와 함께 황푸하가 지금까지 발매한 명곡들을 담은 ‘트랙제로’ 플레이리스트도 멜론에 이날 공개된다. ‘첫 마음’, ‘칼라가 없는 새벽’을 비롯해 김사월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멀미’ 등 총 15트랙의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들은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뿐만 아니라 황푸하는 ‘멜론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세번째 앨범 ‘두 얼굴’을 통해 파격적인 도전을 하게 된 이유와 에피소드 등을 밝히고, ‘아름다움’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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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축복의 회복을 위하여(학개 2:10-19)"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성 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 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0-19)“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 제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했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과 장정들과 기술자 등 많은 유다 인 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십 년 세월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처럼 우상(偶像)을 숭배하며, 온갖 악행(惡行)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20). 그런데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 제국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 인 포로들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역사(役事)였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역대하 36:21-23).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유다 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회복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건자재를 구입하고 필요한 인부들을 고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지 이년 두 달 만에 예루살렘성전 재건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방해하는 주위의 적들 때문에 겨우 <전 지대공사(殿地臺工事)>만을 마친 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시들어지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정도 같이 시들어 들었고, 그들은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전건축을 계속 미뤘습니다. 그러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인들은 하나같이 재산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화려한 저택을 지어 기거하며 쌓은 부를 과시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이전의 신앙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목표로 했던 신앙공동체의 삶이 이제는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삶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적 습관은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외적의 침입과,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그 형편이 말할 수 없이 궁핍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자청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같은 가난과 궁핍의 원인을 알지 못한 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셨고,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전복구공사를 재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어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개 1:9-11)“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인본주의적 신앙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학개 1: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과, 그 결과로 그 많은 재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 닥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했고, 이전처럼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의 재산을 드리고,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신앙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중심주의 삶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다시 임 재하셨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로다! (학개 2:4)“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축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1:12)“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되고 범사가 잘 됩니다. 우리에게서 상실된 축복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상실된 신앙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신본주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의 삶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기에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이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신본주의의(神本主義) 삶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 되고 하나님께 소유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기에 신본주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고 다시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9-10)“ (3) 죄를 멀리하는 삶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1-14)“ (4)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입니다(마태복음 22:37-40,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5)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옛날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궁궐을 짓고,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궁궐 밑에 감옥을 지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럽의 구질서는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개척시대의 청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예배당을 지었고, 다음으로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신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에 의거한 미국의 가치관과 미국의 시민정신이 근대 문명사회의 확립을 위한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는 43세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 때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락도 즐기지 않았고,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만이 그의 취미였고, 사업확장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미국 내 동종사업자들을 무자비하게 파산시켜 모두 그의 회사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석유사업의 95퍼센트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그에게는 악덕기업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한 교회에 거금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을 때,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고 선언하며, 그 기부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10만 달러는 참으로 거금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그의 나이 53세 때,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바로 그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몸에 악성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빠져나갔습니다. 식사 때 마다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까지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 불안함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쁨과, 행복감을 상실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갔습니다. 록펠러를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1년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그를 미워하는 언론사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미리 작성해놓고, 그의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자답게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재산을 교회와, 사회 복지시설과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또 인류의 복리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식량, 인구, 의학,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활동>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재산관리인들에 의해서 문서에 작성된 용도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발명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연 기적의 약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위해서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이 이처럼 다방면으로 인류복리를 위해 쓰이게 될 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악으로 치닫던 그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정상적으로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무표정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가 일년도 못살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후 45년을 더 살며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신자인 그가 탐욕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고, 그와 함께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9)“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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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5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사도행전 15:30-41)"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수일 후 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 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 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35-41)“ 1.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4-26)“ <안디옥>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시>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 째로 큰 대도시였습 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오십 만 가량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으로 피신을 가 그곳에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유대인>들만의 교회였 다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이라는 벽을 허물고 편견 없이 모두를 품는 <이방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 없는 안디옥 교회가 날로 부흥되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이끌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하에 안디옥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고,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안디옥 교회에 이제는 함께 이끌어줄 <동역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그가 오래 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나 잠시 교류했던 <다소> 지방의 <사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소>는 오늘날의 <터기>의 남부지방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울은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에 열심인 자로서,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도록 사주하는 등, 그의 과거의 악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의 기피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진정을 이해하고 포용해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으로 사울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아량과 덕이 많은 <야고보 사도>에게 소개시켰습니다(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 -19).그럼에도 사울은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곧 바로 고향 다소로 돌아가야 했고, 사울의 가치를 알아봤던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도행전 9:26-30).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안목은 적중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 했으며, 사울의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는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자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전도>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의 지시 에 따라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울의 탁월한 <전도의 능력>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 행전 9:15-16)“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방인 교인>들도 <유대인 교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 를 받아 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교란시켰습니다. 이 문제로 이들과 크게 다투며 논쟁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의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의 보고를 기뻐한 예루 살렘 교회 지도부는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즉시로 <지도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교회공동체> 안에 더 이상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각 <지 교회>에 내려 보내는 편지로 작성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먼저 가장 큰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전달을 위해 안디옥으로 귀환을 했고, 이로써 그들의 전도여행도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5:1-35).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재개했습니다만,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지 교회들>이 생각나,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위한 <팀 구성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고, 각각 다른 길로 떠나버립니다. <의견대립의 원인>은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떠난 전도단의 멤버였었는데, <전도사역의 효용성>에 회의를 품은 그는 <밤빌리아>에서 그들 일행과 결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때의 일로 그에게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단호하고 엄격했던 바울 사도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가의 일로 크게 다툰 후 결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제각기 따로 전도단을 구성해서 떠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향해 떠났습니다. 구브로를 <헬라어>로 <쿠프로스(κύπρ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구리>입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리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퍼(Kupper)>, 영어의 <코퍼(Copper) >는 헬라어 <쿠프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브로가 지금의 <키프러스(Cyprus)>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의견차이>로 <결별>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그들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27-28)“ 비록 1차 전도여행으로 유명해진 바울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바나바의 배려로 2차 전도여행에 합류 한 젊은 마가는 바나바의 감화력과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성장하였는데, <신약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로 그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후 다른 기록자들이 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상호보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그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부했던 마가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뒤늦게 그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해준 것이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4:11)“ 그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라도 그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알린 것입니다. 열정만 앞섰지 다듬어지지 못한 마가를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것은, 다름아닌 바나바 의 <사랑과 인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재의 모습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라(Silas)>를 2차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와 교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실라와의 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소아시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성령께서는 도중에 소아시아로 향하 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6-10). <마게도냐>에서 첫번 째로 당도한 성이 <빌립보>였는데, 이곳에서의 <실라>의 역할은 아주 유용했습 니다. 첫째는 그가 마게도냐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로마황제에게 충성했던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의 주민들>에게는 <식민지 거주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언어와 신분 상으로 그들과 대등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라는 여러 면에서 <유럽 선교>에 매우 적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로마서 8:27-28) 4. <인간의 의지> 가운데 <동역(同役)>하시는 하나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신학용어(神學用語)> 가운데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류(同流)>라는 뜻인데 '서로 돕다‘, '협력하다‘를 의미하는 <concur>의 명사형입니다. 이 <동류(concurence)>는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작용>되어,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는 당시 본인들이 깨닫지는 못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학교이지만 1924년경만 해도 이 학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쉐퍼 박사> 바로 옆에서 기도하든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문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닙니까? 그 가축들 중에서 얼마를 팔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가 그 돈으로 이 학교의 빚을 다 갚고, 계속하여 학생들을 양육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에 가축을 가득 싣고 가서 다 팔았습니다. 저는 원래 이 돈을 다른데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이 돈을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니 받아 주십시요! “ 사무실 여자 직원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즉시로 학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여직원으로부터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로 보내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이 목장주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달라스 신학교의 문제해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목장주의 의지>에 그대로 <작용> 한 결과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당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동역(同役)>해주시는 축복된 신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아멘! >
    • 종교
    2023-02-09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후포스타시스’ – 실상과 증거를 가진 믿음”
    [성경/365산업경제뉴스DB] 2005년 5월 31일 새벽 3시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시고 벽시계로부터 흡사 레이저 광선처럼 내 이마 한 중앙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쏘아주셨다. 한 달 후에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영어로 ‘Faith Test’- 믿음 시험이라는 음성이 쑥 찔러졌다. 결국 성령받은 지 33년 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세월이 믿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러했던 것을 알게 하셨고, 이제부터 믿음 시험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들려온 음성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며 댓가를 치르는 희생을 감내하며 이번 5월이면 만 18년이 되는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최종관문인 지금의 오래참음과 인내의 자리까지 따라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 인내의 결과는 이제 약속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5). 처음에 보여주신 천 개의 퍼즐이 맞혀져 그림이 완성되듯이, 믿음-순종-희생-인내의 긴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제 약속의 땅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믿으면” 하고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을 보는 것이며, 풍부함과 풍성한 재정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그동안의 기름부으심을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나라들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부흥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적 계시로 그가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어 믿고 선포하면 현실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하리운에 오래 같이 해 온 분들에게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이번 소드 3년차 ‘조명된 혼과 감취인 것” 질문의 답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 예언에 비추어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때에 그가 하실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나가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2주 전, 혹은 1주 전 말씀하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하셨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번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며 묻고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음으로 묻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일이 패턴화 된 실상과 증거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매 번 같이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주세요” 하고 응답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치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선입견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어떤 일을 주님이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100%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음성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의 리콜운동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그러한 패턴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 가면 “불이 있을 것이다. 통곡이 있을 것이다” 하셨을 때, 나가기 전에 미리 글로 선포하면 그런 일들이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코비드 19이 기승을 부려 나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때인 2020년 5월 “이번에 나가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만남을 통해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고, 아내에게 그해 11월 “이번에 20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신 집회 전 정확히 20명이 들어오고 난 후, 핸폰이 깨어져 연락을 더 못받게 하셨으며, 그후 “더 들어올 것이다” 하신 대로 집회 중 기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 등, 수없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처음 참석한 두 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하고 예언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강력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목요일 소드 3년차에 다룰 초대교회가 가르친 믿음의 헬라어 원어 중 ‘후포스타시스’ 믿음인 것이다. “‘후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예감하고 여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소유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없이 믿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시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일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시는 것이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 주님께서 어제 새벽에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사업하는 한 여집사님에게서 그 전날 전화로 사업체 매각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해와 기도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하리운 밴드에 500명이 있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제 에베드 전도사님이 이미 밴드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가입시켜 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와 가입시켜 준 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전화하고 올 사람이 천 명이다” 하셨고, 이번 천 명 여자 목사들을 시작으로 이전부터 “30명이 준비되면 군대가 온다, 2천, 4천이 온다. 풍성한 재정이 올 것이다”의 실현인 것이다. ***보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다. 그들은 열매를 누리는 선두주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듣고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 눈에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이다. 아직 자아가 굴복되지 않았고 주님과 진리보다, 주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일과 사역이 더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일이 많아서, 사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과연 하나님의 일을 두고 무엇이 바쁘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는 아니다 그래서 구분된다 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셨다. 그동안 1년 넘게 하리운에 몸담은 분들은 막연히 바라는 그런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제 그 믿음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리운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시대적/전국적/세계적 부흥의 영광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다!” “내 일처럼, 내 가정 일처럼, 내 사업하는 것 처럼 하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믿는 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대로 순번이 정해지고 있다. 땡큐 로드. 크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종교
    2023-02-08
  • [오늘의 말씀]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1:1∼4)"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1] <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2] 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3]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4] <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5] 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6] <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7] 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8]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9] 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
    • 종교
    2023-02-04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격려하고 들어주고 위로해 주라”
    [365사업경제뉴스DB] 오늘 이곳 토요일 새벽에 “마음에는 안들고 그것 밖에 못하나?” 생각하지 말고, 그 수준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라 하셨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그 정도 밖에 못하나? 그러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좋은 교사는 같은 연령대라도 다 발달 정도가 다르니 잘하는 학생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있는 수준에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어 더 나은 성적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장이나 숙제 검사에 웃는 그림과 함께 “참 잘했아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칭찬하면 좀 부족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격려는 가능성을 더욱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폴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시련은 더욱 단단하게 하는 단련, 그리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준에서 잘한다 칭찬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성장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우리 하리운 회원 한 분을 보여 주시면서 어려웠던 때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라. 치료해 주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날에 대한 기억의 깊은 내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상처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하셨다. 내적치유 훈련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지만, 같이 모여 있어 치유를 위한 실제 사역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론은 알지만 아직 치유받지 못한 감정 치유와 참된 용서를 통한 자유함을 얻도록 도움을 주라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배웠고 또한 “회개했다, 용서했다, 내적치유를 많이 받아 봤다” 하면서도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이 실제 믿음이 되기 전에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아직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 종으로 팔려가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 없이 인내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고난 속에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해를 선으로 바꾸셨다” 고백하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후대한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내적치유는 상한 마음의 치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치유하시고 우리의 뿔(권세)을 높이셔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로 쓰시기 원하신다. 주의 행사(하시는 일)를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주를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2). 시편 92:4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편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삶의 목적과 사명을 알도록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종교
    2023-02-03

실시간 종교 기사

  • Next 세대 Ministry 대표 김영한 목사 북리뷰, '은밀하게 위대하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정진호 이 책은 주기도문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주기도문을 넘어선 신앙의 핵심 부분을 다루는 듯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저자는 풍성한 책과 예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 여행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저자는 주기도문이 단순히 머리 지식이 아니라, 가슴과 삶의 신앙으로 뻗어나가길 원한다. 하버드 정신의학 및 의료 인문학 교수,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는 <고등 교육 신문>에 ‘지성과 불균형’이라는 기사를 통해 경제적 수준이 낮으면 여학생에게 예의와 존중도 없음을 언급하면서, 달라드 윌라드의 말을 인용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성품과 지성의 연결이라기보다는 지성을 도덕적, 영적 실제와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품은 이미 지성과 연결돼 있다. 실은 그것이 문제다. 지성 안에 무엇이 들어 있고, 들어 있지 않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을 기술한다. “시대가 필요한 것은 천재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넘쳐났다.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순교자,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각성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기에, 내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저자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주기도문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신앙인이 더 절실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그냥 주기도문에 관한 책이 아니라 신앙 전반적인 부분을 터치하고 있다.
    • 종교
    2022-02-05
  • 다니엘미션미니스트리 오준섭 선교사,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이자 패션 디자이너이며 작가인 인도의 ‘크리시다 로드리게스’ 는 암에 걸려 임종 직전에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습니다. 많 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영감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글은 이렇습니다. 1. 나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차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병원 휠체어에 앉아 있다. 2. 나의 집에 디자인이 다양한 옷과 신발, 장신구 등 비싼 물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 는 병원의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다. 3. 은행에 아주 많은 돈을 모아 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 병은 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다. 4. 나의 집은 왕궁처럼 크고 대단한 집이다. 그러나 나는 병원 침대 하나만 의지해 누 워 있다. 5. 나는 별 5개짜리 호텔을 바꿔가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병원의 검사소를 옮 겨 다니며 머물고 있다. 6. 나는 유명한 옷 디자이너였으며 계약체결 때 나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 그러나 지 금은 병원의 진단검사지에 사인하고 있다. 7. 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장식품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 비싼 보석을 장식할 머 리카락이 없다. 8. 나는 자가용 비행기가 있어서 어디든 갈 때 타고 갔다. 그러나 지금은 간호사의 두 팔로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9. 나에겐 먹고 마시는 비싼 식품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병원에서 약 먹을 물 만 있다. 비행기, 보석, 장식품, 비싼 옷, 많은 돈, 비싼 차 등 다 있지만 지금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오직 드리고 싶은 말은 사람이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길 기원하고 타 인을 돕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생은 너무나 짧다. 이 한 생애에 비싼 물건 들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다. 2018년 9월 함께 나누지 못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메시지를 남긴 후, 그 이틀 후에 그녀는 운명했습니다. 많이 가져도 후회가 남는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이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잠시 잠깐 머물다가는 이생에 영원히 거할 것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그곳에 마음 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삶이며,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방법입 니다. 우리 모두, 당당히 생을 마감할 수 있는 후회 없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 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 니라” - 사무엘상 15장 11절 -
    • 종교
    2022-02-04
  • KEEN Ministry Coordinator 정서영 선교사, '실천 항목을 결정하고 지켜나가라'
    레위기 13장 45. 나병환자는옷을찢고머리를풀며윗입술을가리고외치기를부정하다부정하다할것이요 “Anyone with such a defiling disease must wear torn clothes, let their hair be unkempt, cover the lower part of their face and cry out, ‘Unclean! Unclean!’ 46. 병있는날동안은늘부정할것이라그가부정한즉혼자살되진영밖에서살지니라 As long as they have the disease they remain unclean. They must live alone; they must live outside the camp. ‘Unclean! Unclean!’(45) 나병환자와나병이란특정질병을부정한것으로정한구약의계명은현대사회를살아가는입장에선선뜻납득되지않는부분이긴하지만전염성이라든지치명적인병증과고통이수반된불치병이라고보았을때당시사회에서얼마나심각한병으로치부했을지알듯하다. 지금같은코시국에도엄청난발전을이룩한현대의학을총동원해도결국은사회적거리두기가가장효과적인예방책이되는것처럼나병으로인한펜데믹을막기위해선사회로부터격리시키는방법이어쩌면유일무이한대응책이었을지도모른다. 거리두기. 적어도우리의육신을갉아먹는것들로부터내몸을보호하는방법이거리두기인것처럼영적인존재인우리는거룩함을지키기위해거룩을방해하는것들로부터의거리두기실천이매우중요해보인다. 거룩을방해하는것은생각보다많으며생각보다내삶에가까이그리고깊이자리하고있다. 명확하게규정을정해지켜야했었던것처럼내자신과가정과커뮤니티를지키려면나역시도거룩을지키기위해실천항목을결정하고지켜나가야한다.
    • 종교
    2022-01-29
  • 브레드하우스 대표 박길웅 목사, '구제보다 더 중요한 일'
    “구제보다 더 중요한 일” 1.가난하고 병든 자들, 특별히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마음 쓰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사실은 성경을 읽은 자들이라면 누구나 명백히 아는 사실이다. 2.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한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예수님께 매우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부어드렸다. 이런 놀라운 일에 금액으로 환산하는 자체가 우스꽝스럽지만,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14장 5절에 의하면 약 300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향유였음을 알 수 있다. 3.통상적으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라 가정한다면, 크게 잡아 평범한 노동자의 약 1년치 연봉으로 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합당한 대우를 받기 더 어려운 여인들의 같은 경우라 친다면 몇 년치라는 기준 보다는 평생에 모은 전재산 정도로 비유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4.어쨌든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의 전부가 걸린 혹은 한 사람의 연봉정도의 고가의 향유를 한 사람의 머리에 붓기 위해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깨뜨렸다는 사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이겠지만, 그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의 눈에는 얼마나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5.제자들은 순전한 나드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걱정과 염려 보다는 무려 삼 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가 바닥에 흘러 넘치도록 부어진 ‘아까운’ 이 현상에 주목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늘 긍휼한 마음을 가지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마음에, 여인을 나무라며 ‘이 아까운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더 좋았겠다’ 열을 올렸다. 6.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이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 그가 ‘나를 위하여’ 좋은 일, 곧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며 여인을 감싸셨다. 누구보다도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주님이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면 더 유용하게 쓰일 것을 왜 모르셨겠는가? 7.그러나 주님의 초점은 다른 곳에 있으셨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도 지향해야 하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일이었다. 8.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언제든 우리가 가진 것으로 크게 때로는 작게 섬길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로 향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기억하며,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때는 순간적이며, 기회적이며, 지금이 지나면 훗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해진 때가 있는 것이다. 9.주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일과 더 중요한 일을 구분하는 우선 순위의 설정이 필요하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바로 오늘’의 순간에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다면 흘려 보내지 말고 꼭 그 옥합을 깨뜨려 마땅히 부어 드려야 할 곳에 부을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 종교
    2022-01-26
  • 평택 현덕중앙감리교회 조상현 목사, '결코 당연하지 않은 사랑'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자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갑작스런 불로 마구간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공자의 첫마디는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 였습니다. 당시 말과 사람의 가치를 비교해 볼 때 단연 말이 마구간 일꾼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던 시대였습니다. 말의 값어치를 접어두고라도 말의 안위보다 사람을 먼저 걱정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처음 자동차를 샀을 때 제 스스로에 한 다짐이 있습니다. ‘혹시 아내가 사고를 내더라도 차 상태는 묻지 말고, 아내를 먼저 걱정하자!’ 사고는 뒷수습하면 별 탈 없이 끝나지만, 이때 한번 잘못 처신했다가는 두고 두고 원망 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기우가 현실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차를 산지 한 달 만에 아내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사고가 났답니다. 정확히는 사고를 냈다고 했습니다. 자동차 걱정이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숱한 다짐의 결과로 능숙하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괜찮아? 어디 다친데 없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를 먼저 묻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저는 당연한 그 일을 노력을 기울여 해낸 겁니다. 대강절을 보내며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결코 당연할 수 없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왠지 모르게 가슴 저미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은혜롭고 귀한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희생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특별한 사랑이 쏟아지는 시간입니다. 묵상하며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임한 그 크신 사랑 앞에서 주님을 더욱 깊이 갈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가슴 벅찬 은혜가 우리의 삶에 충만하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종교
    2022-01-25
  •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질병으로부터의 자유(2)'
    <질병으로부터의자유> - 2 앞에서우리들은우리들이질병으로부터자유하기위해서해결해야할두가지의문제가있었다고했습니다. 그것은첫째주님이주님이하실수있다는믿음을갖는것이고, 두번째는주님이원하신다는것을아는것이라고하였습니다. 그런데오늘은믿음에대해서보다더깊이들여다볼까합니다. 우리들은질병으로부터자유하기위해서주님이하실수있다는것도믿어야하지만, 주님이이미하셨다는것도믿어야합니다. 일찍이주님은이사야선지자를통해서이렇게말씀하셨습니다. “그가징계를받으므로우리는평화를누리고그가채찍에맞으므로우리는나음을받았도다.”(사 53:5) 분명히이사야선지자는우리들의치유를 ‘완료형’으로쓰고있습니다. 그리고베드로사도역시이말씀을그냥그대로인용하면서이놀라운사실이우리주예수그리스도안에서이미완료된상황인것을선포하였습니다. “친히나무에달려그몸으로우리죄를담당하셨으니이는우리로죄에대하여죽고의에대하여살게하려하심이라. 그가채찍에맞음으로너희는나음을얻었나니너희가전에는양과같이길을잃었더니이제는너희영혼의목자와감독되신이에게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그런데우리들은자꾸이렇게생각을합니다. “아니, 아직도나는고통이있고통증이있는데?” “병원의의사는아직도나를치유의대상으로보고있는데?” “나는아직도예전과같은모습으로정상적인삶을살고있지못한데?” 그러나우리들은이생각이틀렸다는것을알아야합니다. 믿음이란무엇입니까? 그리스도안에머물고있는우리들의믿음은불신자들이갖고있는믿음과다르다는것을알아야합니다. 우리들의믿음은우리들의감정이나느낌을붙잡는것이아닙니다. 우리들의믿음은우리들의생각이나세상의전문가들이주는어떤지식적인정보를붙잡는것도아닙니다. 우리들의믿음은주님이행하신것은붙잡는것이고그래서말씀을붙잡는것이고그래서그리스도안에언제나고요하고평화롭게거하는것입니다. 당신이그리스도안에온전히거하고있다면이미치유된것입니다.
    • 종교
    2022-01-22
  • 아나돗교회 담임 정이신 목사, '알파며 오메가'
    [1] <요한계시록>은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썼습니다. 로마 황제가 하나님께 반역해서 주님을 무시하고 모든 걸 제멋대로 할 때, 초대교회 성도 중 일부는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 때문에 자신들이 이처럼 참혹한 고난을 겪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책을 통해 누가 참된 왕인지 초대교회에 알려줬고, 이 편지를 읽고서 초대교회 성도는 힘을 얻었습니다. 요한은 로마 황제가 하나님께 반역해서 자기가 진짜 왕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짓 왕의 압박에 흔들리지 말고 인내하라고 했습니다(13:10). 하나님이란 진짜 왕을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 주님은 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건재하시니 누가 뭐라고 하면서 거짓된 언행으로 설쳐대도 주님이 정하신 시간에 모든 걸 바로 잡으십니다. 요한은 그때까지 믿음으로 견디며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게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가짜는 육신을 입은 채 살아가는 해 아래 세상에서만 위력을 발휘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가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시공간은 지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 아래 세상에 나타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땅을 깡그리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되 이 땅으로 모든 게 끝난다는 가짜에 동의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해 아래 세상으로 모든 게 끝난다는 말은 허구이고 착각이지 절대 진실이 아닙니다. [2] <5절>에서 요한은 은혜와 평화를 말했습니다. 은혜는 헬라인, 평화는 유대인이 추구했던 덕목인데 요한은 이 둘을 같이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가 평화이기에 요한은 이 둘을 연합해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마음의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과 인류의 모든 평화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툼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상대를 인정하는 평화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평화를 위해 주어지는 은혜는 한 번 받으면 그걸로 족한 게 아니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끊임없이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유입되지 않으면, 우리가 크리스천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초대교회 성도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강림하기를 기원했습니다. [3] <1:7a>는 <다니엘서 7:13>, <1:7b>는 <스가랴서 12:10>를 인용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이 구약성경을 설명하면서 미드라쉬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두 구절을 조합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인용한 <다니엘서 7:13>에 나온 하늘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당시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육신(싸르크스)을 통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1:14). 따라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같이 읽었을 때 ‘구름의 정체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수단이고, 주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요한이 증언한 이 은혜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주님이 구름 타고 강림하는 것으로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 20:18). 따라서 구름은 <요한복음 1:14>에서 말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다니엘은 구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했고,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4] <6절>에서 요한은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받는다는 이야기를 써 놓고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요한이 악인이 하나님께 심판받는 걸 즐거워해서 한 말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배경이 깔린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을 향해 이동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누가 모든 것의 진짜 실권자인지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인류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시고, 인간들이 저지른 죄로 어그러진 질서를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장 끝에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전부가 아니라 말세와 다른 인류의 종말은 있습니다. 우주의 끝, 세상의 종말이 있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야기합니다. 둘 다 그날은 지구적인 게 모두 끝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주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반응은 다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요한처럼 “아멘”이라고 외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그냥 우주의 끝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노멘’이라고 외치는 무신론자입니다. [5] 교회는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 둘은 서로 필요한 것이면서도 때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성경에서 이걸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를 ‘교회의 승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건 교회가 인간만의 모임이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에는 해 아래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인간에 의해 고안되지 않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님이 주신 여러 가지 기능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걸 통칭해서 우리는 성령님이 주신 은사라고 합니다. 이 은사 외에 인간적인 요소가 더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지체인 성도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해 아래 세상에서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걸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6] 교회에 신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많을 때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짙어집니다. 반대로 인간적인 요소가 많으면 교회가 세속화돼 세상과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 둘이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되 반드시 그 울림이 신적인 요소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방식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긴장의 울림이 인간적인 요소로 치우치면 교회는 그때부터 빛을 잃습니다. 침묵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이란 진짜 왕이 계신다는 신적인 요소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의 권력이라는 인간적인 요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사기업과 같은 신앙조직체가 됩니다. 신앙공동체에는 요한에게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립니다(10절). [7] 요한은 자신을 초대교회 성도의 형제라고 했습니다(9절).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징표는 예수님 안에서 받는 고난이었습니다(빌립보서 1:29). 헬라어로 보면 고난(파스코)과 환난(틀립시스)이 다르지만, 이 단어를 크리스천에게 성령님이 주신 신앙의 지침으로 보면 하나로 연합해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관사에 “환난, 나라, 인내”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런 용법은 3개의 명사를 한 단위로 해서 서로 이해하란 지침입니다. 이런 용법으로 보면 <9절>에 있는 3개의 명사는 모두 “예수님 안에서”라는 말 속에서 서로 연결되는데, 예수님 안에서 나라가 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예수님을 위해 환난 받는 게 초대교회의 형제가 되는 통과의례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속에 기대어 빵을 먹던, 남다른 친교를 그분과 나눈 사람입니다. 이런 식사법은 유대인의 풍습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서 식사하는 건 로마의 귀족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에서 자기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였다고 은근히 자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형제라고 그를 소개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가 겪었던 환난이 그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8] “성령님에 사로잡혔다”란 말은 요한이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영감의 근원이 성령님으로부터 왔다는 말도 되고, ‘황홀경의 상태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10절). 요한이 밧모섬에서 경험했던 일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그가 경험했던(사도행전 2:1∼4) 성령님의 강림과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밧모섬에서 그가 환상을 본 건, 이 환상이 전적으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염려하며 기도하다가 환상을 본 게 아닙니다. 아무런 자각이나 의식도 없이 성령님의 은혜로 갑작스럽게 황홀경으로 빠져들었고, 거기에서 이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분이 들려주시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는 사이비ㆍ이단에서 성령님과 상관없이 가짜로 만들어낸 계시자가 본 환상과 다릅니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무수한 사이비ㆍ이단 교주의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한 환상은 그가 본 것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난 게 아닙니다. [9]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는 예수님이 주님인지 인간이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고린도전서 12:3).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비밀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이 책에서 성령님이 요한에게 알려줘 증언하게 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말한 그분이며,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1:17∼18). 그런데 이제 더는 이 메시지를 봉인할 필요가 없습니다(22:10).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1절). <출애굽기 19:21>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님을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사기 13:22>에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그의 아내와 그가 하나님을 봤으니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 요한이 <1절>에서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에게 계시를 줬으나, 그에게는 천사를 통해 주셨다고 한 말은 이런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기에 그분과 주님은 직접 통하지만, 그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에 천사라는 중간 통로가 필요했습니다.
    • 종교
    2022-01-21
  • Former Pope Benedict failed to act over abuse, new report finds
    [The former pope is reported to have submitted dozens of pages of answers to the law firm's questioning, in which he expressed support for the inquiry but denied any knowledge or lack of action around the abuse allegations. The report, however, contains minutes that strongly suggest he was present at a meeting at which the subject was discussed.(Photo by= Reuters)] Former Pope Benedict XVI failed to act over four child abuse cases when he was archbishop of Munich, a German probe into the Catholic Church has alleged. BBC said that Pope Benedict then called Josef Ratzinger, held the position from 1977 to 1982. He has denied the accusations.But a new report into historical abuse allegations carried out by a German law firm incriminated the former pontiff. The abuse continued under his tenure, it is alleged, and the accused priests remained active in church roles. The former pope, now aged 94, became the first Church leader to resign in more than 600 years in 2013, citing exhaustion. Since then, he has led a largely quiet life in the Vatican City and is known as pope emeritus. The new report from German law firm Westpfahl Spilker Wastl was commissioned by the Catholic Church. The former pope is reported to have submitted dozens of pages of answers to the law firm's questioning, in which he expressed support for the inquiry but denied any knowledge or lack of action around the abuse allegations. The Vatican said in a statement that it would examine the details of the report once it had been published. In addition to the former pope, the report criticized other Church figures, including the region's current archbishop, Cardinal Reinhard Marx. He’s found to have failed to act in two cases of alleged abuse.
    • 종교
    2022-01-21
  • 청년사역연구소 대표 이상갑 목사, '성경에 기초하여 구원을 확신하라.'
    무속적 신앙에서 성경적 신앙으로 가야 한다. 무속의 영향을 받을수록 비윤리적이고 자기만 챙기는 기복으로 향한다. 진정한 신앙은 윤리적이고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한다. 만일 구원조차도 무속과 기복으로 향하면 위험한 일이다.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정말 구원 받으셨습니까? 만일 당신이 오늘 밤에 죽는다면 진짜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 대부분은 강하게 질문하면 할수록 확신이 떨어진다. "그게 좀..." 왜 그럴까? 구원의 확신을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 제대로 이해하기> 1)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 <십자가>에 기초한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이신칭의, 변함없는 사실이고 진리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4) 구원받았다면 은혜에 대한 각성, 자각, 반응이 이어진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늘에 찔려도 아픈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은혜에 대한 자각과 반응이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삶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고 사회를 맑고 밝고 투명하게 환하게 이롭게 할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기복을 제하고 오히려 더 윤리적이고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할 것이다. 결론: 그러므로 성경에 기초하여 구원을 확신하라. 1) 감정이 사실을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감정을 끌고 가도록 하라. 2)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언 받았음을 확신하라. 3)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 그러면 구원의 투구는 안전하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견고히 설 것이다.
    • 종교
    2022-01-20
  • Next 세대 Ministry 대표 김영한 목사 북리뷰, '왜곡된 진리'
    <왜곡된 진리>, 리처드 마우 책을 다시 꺼내어 읽었습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세계관 전쟁터에 잠시 나갔다 온 기분입니다. 일원론의 문제가 무엇인지, 기독교는 왜 이원론을 따를 수밖에 없는지, 21세기 과학과 이성주의 속에 어떻게 다시 주술에 빠진 세상에 사는지, 허무주의와 상대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잘 가이드를 해 줍니다. 좀 더 책에 관한 내용은 추천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리처드 마우는 우리가 총성 없는 세계관 전쟁터에서 매일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책은 가볍게 열었다가 쉽게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살벌한 야생 숲에서 보이지 않는 무서운 실체로부터 피할 곳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을 가지고 싸우기는 싸웠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그냥 방향 없이 총기를 난사하고 있었음을 모니터링 해 준다. 분명,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절대 위태롭지 않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위태로운 가운데 살아온 이유와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리처드 마우는 일원론과 이원론의 거대한 충돌 속에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묻는다. 21세기 여전히 주술에 걸린 세계와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숙고하게 해 준다. 이제는 허무주의를 넘어, 상대주의 속 우리 곁에 어떤 위협과 도전의 지뢰가 우리 곁에 널려 있는지 목도 하게 해 준다. 지금 우리 곁에 어떤 보이지 않는 공격이 펼쳐지고 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펼쳐 보면 된다. 목회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읽고, 어떤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갈지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면 좋겠다. 평신도라면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그저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 가기를 소망하는 도생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튼실히 생존해 내는 영적 전사가 되기를 바란다!
    • 종교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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