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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 트랙제로 3월 ‘이달의 아티스트’ 선정 ‘노래하는 목사’ 황푸하
    [사진제공=멜론] 싱어송라이터 황푸하가 ‘노래하는 목사’라는 독특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과 자신만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털어놓는다.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은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를 통해 3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싱어송라이터 황푸하와 함께 한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들을 2일 오전 10시30분 멜론 스테이션에서 공개한다. 포크 뮤지션인 황푸하는 이날 멜론 스테이션 ‘트랙제로’ 초대석에 출연해 ‘노래하는 목사’가 된 비하인드 스토리, 이름에 담긴 뜻,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 숨은 명곡 플레이리스트 등을 전한다. 이어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이자 출애굽기(Exodus)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담은 앨범 ‘두 얼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며 리스너들과 소통할 예정이다.신앙 생활과 음악 두가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푸하는 “아름다움, 사랑 등이 ‘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노래’가 신을 볼 수 있는 창문인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철학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이와 함께 황푸하가 지금까지 발매한 명곡들을 담은 ‘트랙제로’ 플레이리스트도 멜론에 이날 공개된다. ‘첫 마음’, ‘칼라가 없는 새벽’을 비롯해 김사월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멀미’ 등 총 15트랙의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들은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뿐만 아니라 황푸하는 ‘멜론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세번째 앨범 ‘두 얼굴’을 통해 파격적인 도전을 하게 된 이유와 에피소드 등을 밝히고, ‘아름다움’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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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축복의 회복을 위하여(학개 2:10-19)"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성 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 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0-19)“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 제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했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과 장정들과 기술자 등 많은 유다 인 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십 년 세월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처럼 우상(偶像)을 숭배하며, 온갖 악행(惡行)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20). 그런데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 제국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 인 포로들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역사(役事)였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역대하 36:21-23).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유다 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회복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건자재를 구입하고 필요한 인부들을 고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지 이년 두 달 만에 예루살렘성전 재건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방해하는 주위의 적들 때문에 겨우 <전 지대공사(殿地臺工事)>만을 마친 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시들어지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정도 같이 시들어 들었고, 그들은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전건축을 계속 미뤘습니다. 그러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인들은 하나같이 재산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화려한 저택을 지어 기거하며 쌓은 부를 과시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이전의 신앙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목표로 했던 신앙공동체의 삶이 이제는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삶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적 습관은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외적의 침입과,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그 형편이 말할 수 없이 궁핍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자청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같은 가난과 궁핍의 원인을 알지 못한 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셨고,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전복구공사를 재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어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개 1:9-11)“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인본주의적 신앙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학개 1: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과, 그 결과로 그 많은 재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 닥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했고, 이전처럼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의 재산을 드리고,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신앙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중심주의 삶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다시 임 재하셨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로다! (학개 2:4)“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축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1:12)“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되고 범사가 잘 됩니다. 우리에게서 상실된 축복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상실된 신앙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신본주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의 삶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기에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이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신본주의의(神本主義) 삶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 되고 하나님께 소유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기에 신본주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고 다시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9-10)“ (3) 죄를 멀리하는 삶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1-14)“ (4)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입니다(마태복음 22:37-40,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5)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옛날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궁궐을 짓고,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궁궐 밑에 감옥을 지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럽의 구질서는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개척시대의 청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예배당을 지었고, 다음으로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신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에 의거한 미국의 가치관과 미국의 시민정신이 근대 문명사회의 확립을 위한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는 43세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 때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락도 즐기지 않았고,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만이 그의 취미였고, 사업확장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미국 내 동종사업자들을 무자비하게 파산시켜 모두 그의 회사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석유사업의 95퍼센트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그에게는 악덕기업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한 교회에 거금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을 때,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고 선언하며, 그 기부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10만 달러는 참으로 거금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그의 나이 53세 때,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바로 그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몸에 악성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빠져나갔습니다. 식사 때 마다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까지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 불안함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쁨과, 행복감을 상실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갔습니다. 록펠러를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1년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그를 미워하는 언론사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미리 작성해놓고, 그의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자답게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재산을 교회와, 사회 복지시설과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또 인류의 복리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식량, 인구, 의학,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활동>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재산관리인들에 의해서 문서에 작성된 용도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발명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연 기적의 약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위해서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이 이처럼 다방면으로 인류복리를 위해 쓰이게 될 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악으로 치닫던 그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정상적으로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무표정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가 일년도 못살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후 45년을 더 살며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신자인 그가 탐욕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고, 그와 함께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9)“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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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5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사도행전 15:30-41)"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수일 후 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 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 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35-41)“ 1.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4-26)“ <안디옥>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시>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 째로 큰 대도시였습 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오십 만 가량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으로 피신을 가 그곳에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유대인>들만의 교회였 다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이라는 벽을 허물고 편견 없이 모두를 품는 <이방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 없는 안디옥 교회가 날로 부흥되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이끌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하에 안디옥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고,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안디옥 교회에 이제는 함께 이끌어줄 <동역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그가 오래 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나 잠시 교류했던 <다소> 지방의 <사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소>는 오늘날의 <터기>의 남부지방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울은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에 열심인 자로서,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도록 사주하는 등, 그의 과거의 악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의 기피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진정을 이해하고 포용해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으로 사울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아량과 덕이 많은 <야고보 사도>에게 소개시켰습니다(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 -19).그럼에도 사울은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곧 바로 고향 다소로 돌아가야 했고, 사울의 가치를 알아봤던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도행전 9:26-30).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안목은 적중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 했으며, 사울의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는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자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전도>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의 지시 에 따라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울의 탁월한 <전도의 능력>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 행전 9:15-16)“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방인 교인>들도 <유대인 교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 를 받아 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교란시켰습니다. 이 문제로 이들과 크게 다투며 논쟁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의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의 보고를 기뻐한 예루 살렘 교회 지도부는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즉시로 <지도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교회공동체> 안에 더 이상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각 <지 교회>에 내려 보내는 편지로 작성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먼저 가장 큰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전달을 위해 안디옥으로 귀환을 했고, 이로써 그들의 전도여행도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5:1-35).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재개했습니다만,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지 교회들>이 생각나,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위한 <팀 구성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고, 각각 다른 길로 떠나버립니다. <의견대립의 원인>은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떠난 전도단의 멤버였었는데, <전도사역의 효용성>에 회의를 품은 그는 <밤빌리아>에서 그들 일행과 결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때의 일로 그에게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단호하고 엄격했던 바울 사도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가의 일로 크게 다툰 후 결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제각기 따로 전도단을 구성해서 떠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향해 떠났습니다. 구브로를 <헬라어>로 <쿠프로스(κύπρ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구리>입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리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퍼(Kupper)>, 영어의 <코퍼(Copper) >는 헬라어 <쿠프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브로가 지금의 <키프러스(Cyprus)>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의견차이>로 <결별>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그들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27-28)“ 비록 1차 전도여행으로 유명해진 바울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바나바의 배려로 2차 전도여행에 합류 한 젊은 마가는 바나바의 감화력과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성장하였는데, <신약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로 그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후 다른 기록자들이 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상호보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그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부했던 마가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뒤늦게 그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해준 것이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4:11)“ 그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라도 그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알린 것입니다. 열정만 앞섰지 다듬어지지 못한 마가를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것은, 다름아닌 바나바 의 <사랑과 인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재의 모습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라(Silas)>를 2차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와 교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실라와의 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소아시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성령께서는 도중에 소아시아로 향하 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6-10). <마게도냐>에서 첫번 째로 당도한 성이 <빌립보>였는데, 이곳에서의 <실라>의 역할은 아주 유용했습 니다. 첫째는 그가 마게도냐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로마황제에게 충성했던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의 주민들>에게는 <식민지 거주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언어와 신분 상으로 그들과 대등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라는 여러 면에서 <유럽 선교>에 매우 적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로마서 8:27-28) 4. <인간의 의지> 가운데 <동역(同役)>하시는 하나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신학용어(神學用語)> 가운데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류(同流)>라는 뜻인데 '서로 돕다‘, '협력하다‘를 의미하는 <concur>의 명사형입니다. 이 <동류(concurence)>는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작용>되어,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는 당시 본인들이 깨닫지는 못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학교이지만 1924년경만 해도 이 학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쉐퍼 박사> 바로 옆에서 기도하든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문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닙니까? 그 가축들 중에서 얼마를 팔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가 그 돈으로 이 학교의 빚을 다 갚고, 계속하여 학생들을 양육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에 가축을 가득 싣고 가서 다 팔았습니다. 저는 원래 이 돈을 다른데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이 돈을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니 받아 주십시요! “ 사무실 여자 직원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즉시로 학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여직원으로부터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로 보내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이 목장주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달라스 신학교의 문제해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목장주의 의지>에 그대로 <작용> 한 결과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당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동역(同役)>해주시는 축복된 신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아멘! >
    • 종교
    2023-02-09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후포스타시스’ – 실상과 증거를 가진 믿음”
    [성경/365산업경제뉴스DB] 2005년 5월 31일 새벽 3시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시고 벽시계로부터 흡사 레이저 광선처럼 내 이마 한 중앙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쏘아주셨다. 한 달 후에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영어로 ‘Faith Test’- 믿음 시험이라는 음성이 쑥 찔러졌다. 결국 성령받은 지 33년 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세월이 믿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러했던 것을 알게 하셨고, 이제부터 믿음 시험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들려온 음성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며 댓가를 치르는 희생을 감내하며 이번 5월이면 만 18년이 되는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최종관문인 지금의 오래참음과 인내의 자리까지 따라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 인내의 결과는 이제 약속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5). 처음에 보여주신 천 개의 퍼즐이 맞혀져 그림이 완성되듯이, 믿음-순종-희생-인내의 긴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제 약속의 땅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믿으면” 하고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을 보는 것이며, 풍부함과 풍성한 재정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그동안의 기름부으심을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나라들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부흥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적 계시로 그가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어 믿고 선포하면 현실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하리운에 오래 같이 해 온 분들에게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이번 소드 3년차 ‘조명된 혼과 감취인 것” 질문의 답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 예언에 비추어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때에 그가 하실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나가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2주 전, 혹은 1주 전 말씀하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하셨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번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며 묻고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음으로 묻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일이 패턴화 된 실상과 증거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매 번 같이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주세요” 하고 응답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치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선입견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어떤 일을 주님이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100%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음성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의 리콜운동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그러한 패턴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 가면 “불이 있을 것이다. 통곡이 있을 것이다” 하셨을 때, 나가기 전에 미리 글로 선포하면 그런 일들이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코비드 19이 기승을 부려 나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때인 2020년 5월 “이번에 나가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만남을 통해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고, 아내에게 그해 11월 “이번에 20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신 집회 전 정확히 20명이 들어오고 난 후, 핸폰이 깨어져 연락을 더 못받게 하셨으며, 그후 “더 들어올 것이다” 하신 대로 집회 중 기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 등, 수없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처음 참석한 두 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하고 예언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강력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목요일 소드 3년차에 다룰 초대교회가 가르친 믿음의 헬라어 원어 중 ‘후포스타시스’ 믿음인 것이다. “‘후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예감하고 여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소유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없이 믿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시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일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시는 것이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 주님께서 어제 새벽에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사업하는 한 여집사님에게서 그 전날 전화로 사업체 매각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해와 기도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하리운 밴드에 500명이 있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제 에베드 전도사님이 이미 밴드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가입시켜 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와 가입시켜 준 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전화하고 올 사람이 천 명이다” 하셨고, 이번 천 명 여자 목사들을 시작으로 이전부터 “30명이 준비되면 군대가 온다, 2천, 4천이 온다. 풍성한 재정이 올 것이다”의 실현인 것이다. ***보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다. 그들은 열매를 누리는 선두주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듣고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 눈에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이다. 아직 자아가 굴복되지 않았고 주님과 진리보다, 주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일과 사역이 더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일이 많아서, 사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과연 하나님의 일을 두고 무엇이 바쁘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는 아니다 그래서 구분된다 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셨다. 그동안 1년 넘게 하리운에 몸담은 분들은 막연히 바라는 그런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제 그 믿음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리운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시대적/전국적/세계적 부흥의 영광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다!” “내 일처럼, 내 가정 일처럼, 내 사업하는 것 처럼 하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믿는 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대로 순번이 정해지고 있다. 땡큐 로드. 크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종교
    2023-02-08
  • [오늘의 말씀]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1:1∼4)"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1] <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2] 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3]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4] <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5] 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6] <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7] 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8]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9] 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
    • 종교
    2023-02-04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격려하고 들어주고 위로해 주라”
    [365사업경제뉴스DB] 오늘 이곳 토요일 새벽에 “마음에는 안들고 그것 밖에 못하나?” 생각하지 말고, 그 수준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라 하셨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그 정도 밖에 못하나? 그러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좋은 교사는 같은 연령대라도 다 발달 정도가 다르니 잘하는 학생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있는 수준에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어 더 나은 성적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장이나 숙제 검사에 웃는 그림과 함께 “참 잘했아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칭찬하면 좀 부족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격려는 가능성을 더욱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폴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시련은 더욱 단단하게 하는 단련, 그리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준에서 잘한다 칭찬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성장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우리 하리운 회원 한 분을 보여 주시면서 어려웠던 때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라. 치료해 주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날에 대한 기억의 깊은 내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상처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하셨다. 내적치유 훈련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지만, 같이 모여 있어 치유를 위한 실제 사역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론은 알지만 아직 치유받지 못한 감정 치유와 참된 용서를 통한 자유함을 얻도록 도움을 주라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배웠고 또한 “회개했다, 용서했다, 내적치유를 많이 받아 봤다” 하면서도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이 실제 믿음이 되기 전에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아직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 종으로 팔려가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 없이 인내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고난 속에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해를 선으로 바꾸셨다” 고백하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후대한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내적치유는 상한 마음의 치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치유하시고 우리의 뿔(권세)을 높이셔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로 쓰시기 원하신다. 주의 행사(하시는 일)를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주를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2). 시편 92:4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편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삶의 목적과 사명을 알도록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종교
    2023-02-03

실시간 종교 기사

  •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사랑할수록 쉽고 기쁘다'
    “사랑할수록 쉽고 기쁘다”“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를 곤란하게 만드는 짓궂은 질문이다. 답이 문제가 아니라 질문 자체가 선하지 않다. 그럼, 이런 질문은 들어봤는가? “자기야, 내가 좋아, 예수님이 좋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그녀) 역시 사랑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신앙이 좋을수록 이에 대한 답을 하기가 더 곤란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질문 자체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 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오류이다. 예수님을 누구랑 비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강요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온전히 사랑하길 원한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니,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그 누구와 비교하여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누구랑 비교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또한 예수님을 소유와 비교하여, “예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소유를 택할 것인가?”를 묻는 것도 옳지 않다. “예수님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소유가 중요한가?” 이것은 “자기야, 내가 좋아? 예수님이 좋아?”라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어떤 소유와 비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새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주님을 누구랑, 무엇이랑 비교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 자체가 옳지 않고 선하지 않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이고, 삶의 이유이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이고, 예수 제자들의 삶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과 소유랑 비교하며 갈등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와 주님이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한다. 그것은 강요나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의 반응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바다에 푹 잠기니 예수님만 보이고, 더 사랑하고, 더 예배하는 열정이 일어난다. 사랑하니까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고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말이다. 그 사랑의 위대함을 예수님이 증명했고, 성령 하나님이 깨닫게 하고 증거 한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강한 의지와 확신 그리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한계가 있고, 쉽지 않다. 그런데 사랑해 보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려놓는 것은 쉬워진다. 힘을 뺄 수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소유를 사용할 수 있다. 사랑할수록 소유는 보이지 않고 사랑하는 주님만 보인다. 그 주님이 예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 문제이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볍고 기쁘다.“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14:33~35
    • 종교
    2021-02-16
  • 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8:30)Jesus asked him, "What is your name?" "Legion," he replied, because many demons had gone into him. (Lk8:3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을에 사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무 옷도 입지 않았으며 집에서 살지도 않고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여러 번 사로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그를 묶어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고 귀신이 이끄는 대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군대(레기온)입니다.” 이는 많은 귀신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지옥으로 쫓아 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때, 언덕에는 많은 돼지 떼가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그 돼지들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로 들어가 빠져 죽었습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일어난 일을 보고 도망쳐 이 사실을 성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난 일을 보려고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온전하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거라사와 그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로부터 떠나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서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돌아가셨습니다.귀신이 나간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돌려 보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너에게 하신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해라.” 그래서 그는 모든 마을을 다니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눅8:31-39)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영이며 인격체입니다. 사람들이 귀신의 영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면 귀신들린 사람이 됩니다. 귀신들림의 정도는 가벼운 영향을 받는 정도에서부터 완전히 사로잡히는 정도로 다양합니다.본문에 나오는 거라사인의 경우는 귀신에 완전히 사로잡힌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예수님은 스스로는 귀신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라사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귀신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름도 있습니다. 우리가 귀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사람이 자주 딴 사람처럼 다른 인격이 나타난다면 귀신의 존재를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분명히 한 사람인데 다른 인격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은 귀신이 들려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로 귀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름을 예수님처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빠져나갈 것입니다.그래도 안 나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결국은 떠날 것입니다.귀신들은 영적인 존재로서 이름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8:30)
    • 종교
    2021-02-16
  • 우면동교회 정준경 목사, '우리가 이것 밖에 안되나'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오늘 새벽기도회에서 강도사님이 설교 중에 한 말입니다. 오래 전, 섬기던 교회에서 노회가 있어서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형교회의 젊은 담임목사가 오니까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상석을 권하여 앉게 했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젊은 전도사는 "우리가 이것 밖에 안되나" 싶어서 참담했다고 합니다. 새벽부터 그 모습이 상상이 돼서 부끄러웠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뭐하러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주님, 후배들에게 참담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부끄러운 목회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 종교
    2021-02-15
  • 원형복음선교회 김정수 목사, '안식일의 주인께서 기뻐하시는 일'
    소자(小子)들의 복음, 누가복음 6:1-11안식일의 주인께서 기뻐하시는 일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1,5).바리새인들은 안식일(安息日)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그러나 진리의 복음으로 안식일을 완성하시고믿는 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로 주신 분은“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입니다.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마음을 짓누르는 죄 짐과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 때문입니다.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가려보려고율법을 지키고 선행과 공덕을 엮어서 날마다 자기 의의 무화과 나뭇잎 옷을 지어 입습니다.그러니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안식이 있느냐?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완성하시고진리의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건만그들은 “율법과 선행의 일을 해서” 자가발전(自家發電)한 안식을 얻으려고 몸부림칩니다.그러나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임을 당합니다.“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눅 6:6, 9-10).한편 손 마른 자는 거듭나지 못한 모든 인생들의 영적 상태를 계시합니다.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의 죄로 인해서이기심과 자존심이라는 불구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이기심은 자기만을 위하여 움켜쥐려는 욕망이며자존심은 자기의 약점을 꼭꼭 숨기려는 동기입니다.그 사람의 손이 오그라들었듯이,이기심으로 마음이 오그라들고자존심에서 비롯된 위선과 외식으로 자기를 꼭꼭 감추는 이들에게주님은 “네 손을 내밀라”라고 명하셔서 온전케 하셨습니다.진리의 복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면 우리를 얽어매던 죄와 육체의 욕망으로부터도 해방되어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눅 6:11).안식일의 주인이 참된 안식을 얻게 하는 진리의 복음을 전해 주어서평생 오그라든 손으로 살아가는 죄인들을 자유케 하셨으면 “할렐루야! 아멘!” 하고 함께 기뻐할 것이어늘바리새인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을 죽일 궁리만 했습니다.지금도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는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면기독죄인(基督罪人)들은 분을 내며 배척하고 공격합니다.주님은 성경대로의 복음으로 지옥갈 자들에게 영생과 안식을 주십니다.그것이 가장 선한 일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의 사역입니다.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을 좇아 영원한 안식의 복음을 나눠 주는선한 일꾼들입니다. 할렐루야!
    • 종교
    2021-02-14
  • 감리교신학대학교 신약학 김충연 교수, '씨 뿌리는 자의 세 가지 실수'
    막4:14-19 제목: 씨 뿌리는 자의 세 가지 실수앞서 언급한 세 가지 방식의 씨 뿌리는 행동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현명한 농부는 확실히 귀중한 씨앗을 더 책임감 있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음의 지시사항을 전해 주려 할 것입니다: “만약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는, 이렇게 아무생각 없이 자신의 씨앗을 뿌리는 자처럼 하지 말라. 그는 자신의 씨앗을 길가에 떨어질까 혹은 바위위에 혹은 가시덤불 한 가운데에 떨어질까 주의하지 않고 아까운 씨앗을 낭비하였다. 오히려 씨앗을 뿌리기 전에 떨어질 땅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뿌려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의 좋은 씨앗이 아무런 가치 없이 낭비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집중하여 큰 열매를 맺을 만한 곳에만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작업이 효과적이 되고 나쁜 투자와 실망을 피하게 될 것이다”(K. Roos).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하늘의 아버지에게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오랜 기다리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1-2; 비교. 눅13:34-35). 주님은 자신의 노력이 가치가 있는지, 성공할 것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는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고 그를 얻고자 하십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에는 먼저 씨를 뿌리고 쟁기질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파종이후에 그 땅을 발로 밟으면, 거기에는 씨앗이 자라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돌밭에도 이러한 씨앗들은 심겨질 수 있으며, 가시밭들도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발로 다져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쟁기질’을 설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이십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인도하심들, 손실과 실패, 기쁨을 주는 결과들과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들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 열매 맺을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신8:3-5; 롬2:4을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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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3
  • 감리교신학대학교 설교학 이성민 교수, '시편 113편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시 113:6-7)113편은 하늘보다 높이계신 하나님께서(4-5절) 스스로 낮추시어 하늘과 땅을 돌아보시고(6절),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지도자로 세우신다고 예언합니다(7-8절).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변방에 살던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찬미예수.“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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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2
  • 충주 열매맺는교회 이재식 목사,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면 억울함과 분노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면 억울함과 분노는 사라집니다.억울한 일을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화를 낼 일이 한번도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때로는 억울해서 울고 때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눈물이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분노를 사라지게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억울함 때문에 더 서러움을 느끼게 되고 분노 때문에 진저리치며 고통받게 됩니다.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은20에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지만, 보디발 아내의 모함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술맡은 관원장이 복직되었지만, 2년 동안 잊혀졌습니다.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인생을 망쳐야 정상일텐데 요셉은 마침내 총리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환경에 적응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형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성경이 요셉을 형통했다고 기록한 이유는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형통했다고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종으로 팔렸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섰습니다.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불통처럼 보여도 형통입니다.억울한 일에 집중하면 억울해서 살 수 없습니다. 분노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화가 나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면 억울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분노는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어떤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형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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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1
  • 청주 제자순복음교회 강임명 목사, '하이테크와 하이터치'
    “하이테크와 하이터치”하늘을 날아 다니는 자동차, AI로 만들어진 진짜 사람 같은 로봇, 말만 하면 알아 듣고 실행해 주는 자동화 도구들, 집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알아서 청소하는 로봇청소기, 뭐 영화에서 봤던 것들을 이제는 현실에서 볼 수 있고, 실제로 누리고 있다. 처음 대학에 입학 했을 때, 보고서 작성은 거의 대부분 손글씨를 사용했고, 몇몇 앞서간 이들은 타자기를 사용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빠르고 상상 이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에 적응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기술은 편리하고 유익한 도구지만, 그것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점점 더 소외되고 힘들어져 간다. 대면하여 회의하고 결정하고 밥도 먹고 부딪치며 삶을 공유 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비대면 화상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근무하고 전자 시스템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 가니, 쉽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적응해야 하니까, 익숙해지려고 힘겹게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을 하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 그로 인한 내적, 물리적 에너지의 소모를 줄일 수 있어 현대적인 기술과 소통을 더 선호하는 세대는 점점 더 증가한다. 세대와 세대의 차이는 점점 심해지고 그 속도는 더 빨라진다. 이것이 괜찮을 것일까? 기술의 발달이 누군가에게는 효율적이지만, 누군가는 복잡하고 불편한 도구이다. 기술의 발달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외롭고, 공허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허무와 고립에 빠지기도 한다. 이래도 괜찮을까? 나는 나름 선방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그렇지 않다. 사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이다. 코로나19로 고통과 절망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데, 지금 나는 그것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안전할까?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 이전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어서 자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그 위기에 직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가 무너지면 곧 다음이 그리고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운명공동체이다. 그러니 자기 욕심만 챙길 것이 아니라 옆의 사람,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고 함께 어려움에 동참하는 것이 옳다. 기술의 발달도 그렇다. 한쪽만 볼 것이 아니라 다른 쪽 그리고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래전 존 나이스빗은 하이테크의 시대에 하이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이 발달 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와 공감을 위해 하이터치가 필요하다. 서로 눈을 마주보고, 몸을 부딪치고, 서로 화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하이터치가 하이테크 시대의 조화와 균형을 잡아줄 수 있다. 하이테크 시대에 사람을 존중하고 소통하기 위한 친밀한 하이터치가 꼭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조직 안에서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그런 갈등 없이 살 수 있을까? 다툼이 없는 삶이 있을까? 그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하다. 갈등과 다툼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할까? 말이 쉽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모두가 똑같지 않기 때문에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다 다툼이나 분쟁 그리고 분노와 분열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갈등을 드러내고, 그 문제의 원인을 진지하게 살피고, 역지사지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갈등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과 물리적 고통은 어느 정도 견뎌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고통 없이 어떤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게으른 자의 자세이다. 헌신 없이 선한 열매를 맺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을 견뎌내고, 헌신을 각오 했다면, 오히려 갈등 상황은 자신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갈등 상황을 성장의 도구로 삼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성품과 사역의 성장이 일어나고, 공동체적으로는 내적 평화와 연합이 일어난다. 그래서 하이테크 시대에는 더욱 더 하이터치가 필요하다. 지금은 코로19 위기로 제한적인 상황이지만, 잠시 후에는 적극적으로 하이터치를 실행해야 한다.“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눅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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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0
  • Next 세대 Ministry 대표 김영한 목사, '백성이 주께 간구함'
    중국 제선 왕은 맹자에게 신하를 어찌 채용하고, 벌해야 할지 물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나라란 큰 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된 신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왕께는 그런 신하가 없습니다.” 제선 왕은 어떻게 하면 미리 무능한 신하를 알아보고, 쓰지 않아야 할지 물었다. 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나 대부들이 그를 어진 사람으로 추천해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가 어진 사람이라고 할 때, 마지못해 그를 채용하시면 됩니다.신하를 버릴 때나 죽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자는 신하를 등용하고, 죽일 때까지도, 민심을 통해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할 때, 진정 왕은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전국시대는 혼돈의 시대였다. 그때 제선 왕은 직하궁을 마련하고, 천하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 때 맹자는 그런 제선 왕에게 인재를 등용하고, 폐할 때, 사적으로 하지 말고,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면서 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선민 유다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도 하며, 그 백성들의 민심을 알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에도, 유다 백성들의 민심에 요동하지도 않으셨다. 예레미야 14장 19~22절, 성경 하브루타 코칭<백성이 주께 간구함>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1) 누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 같은가? (19-21절)- 백성들이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레미야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예레미야가 백성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고 본다. Again there is a question of the identity of the speaker. Was Jeremiah accusing God of rejecting his people completely, or were the people asking these questions? They had hoped for healing but found only terror (cf. 8:15). It seems more likely that Jeremiah was speaking on behalf of the people, confessing their sins in the spirit of Ezra (Ezra 9:6–15). Huey, F. B. (1993). Jeremiah, Lamentations (Vol. 16, p. 155).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어떻게 중재를 하려고 하였는가? (19절)- 주님이 유다를 온전히 버리셨는지 물었다. - 주의 심령이 시온, 예루살렘을 싫어하시는지 물었다. - 하나님이 유다를 치시고, 치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2)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무엇을 바라보고, 그 결과 어떠하다고 하였는가? (19절)- 유다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 치료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았다고 하였다. 3) 나 자신은 어떤 부분을 치료받기를 원하는가? 사랑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영적 혹 육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까?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1) 예레미야는 어떤 3가지를 말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였는가? (21절) - 첫째, ‘주의 이름’을 위하여 유다 백성들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 둘째, ‘주님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 셋째, 주님께서 ‘유다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He made a threefold appeal to God for mercy. First, for the sake of God’s name (see 14:7), that is, his nature, he should not “despise” Zion (cf. Num 14:13–19). Huey, F. B. (1993). Jeremiah, Lamentations (Vol. 16, p. 155).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2)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어떻게 높이고, 주님의 간섭과 섭리를 기대하였는가? (22절) -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는지 반문하였다. - 그리하면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그리하는 주님이라고 하였다. 3) 예레미야가 주님만 앙망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고백하였는가? (22절) -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였다. 4) 나 자신은 하나님의 어떤 섭리, 어떤 역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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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0
  • KEEN Ministry Coordinator 정서영 선교사, '한 사람의 놀라운 변화'
    Acts 22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I persecuted the followers of this Way to their death, arresting both men and women and throwing them into prison,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as also the high priest and all the Council can testify. I even obtained letters from them to their brothers in Damascus, and went there to bring these people as prisoners to Jerusalem to be punished.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About noon as I came near Damascus, suddenly a bright light from heaven flashed around me.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I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 to me,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Who are you, Lord?' I asked. "'I am Jesus of Nazareth, whom you are persecuting,' he replied.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My companions saw the light,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voice of him who was speaking to me.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What shall I do, Lord?' I asked. "'Get up,' the Lord said, 'and go into Damascus. There you will be told all that you have been assigned to do.'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My companions led me by the hand into Damascus, because the brilliance of the light had blinded me.Get up(10)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울은 그 목적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워졌을 때, 그는 의욕이 넘쳤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단(?)적인 세력들을 잡아드리기 위해 가고 있는 다메섹이 가까워 질 수록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더욱더 끓어 올랐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있었고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예상했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스데반의 처형(순교)의 자리에도 있었고 지금은 꽤 멀리 떨어진 다메섹까지 이단자들을 섹출하기 위해 가고 있는 터였기에 바울은 어쩌면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바울이 한번더 살면서 마주친 적 없었던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정말 기절할 정도로 소름끼치고 충격적인 순간이었을 듯 하다.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신병자나, 범죄자 혹은 이단세력의 우두머리 쯤으로 여겼을 바울이다. 그런데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아닌 예수님이었으니... 그러나 뜻밖에도 바울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핍박한 예수의 목소리임을 알아 채는 순간 바로 "'What shall I do, Lord?' I asked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물으며 바로 엎드린다. 언제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세가 남달랐을 듯 하다. 이 때 주님이 이야기 하신다. Get up! 그리고 바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의 음성을 붙잡고 일어났다. 보이진 않지만 일어섰다. 그리고 어떤 계획과 함께 나아가던 다메섹으로의 여정은 어떤 일도 예상할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한치 앞 일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지금껏 박해해왔던 바로 그 예수의 음성만을 의지해 나아가야 하는 여정이 되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180도로 바뀐 사울. 아니 바울.. 생각해보면 그의 변화는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열심을 내어 살아가는 이유, 모든 신념의 근원 그 대상이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그 삶은 어쩌면 열정적인 그 본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 것도, 바뀌었다기 보다 하나님이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구나를 알게 되어 바뀐게 아니라 믿게 된 것!일 뿐이다. 믿음은 그렇게 사울을 바울되게 하였고. 세상에 두려울 것 없었던 사울은 이제... 한 걸음도 예수의 음성없이는 의미없는 걸음.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담긴 22장의 말씀을 읽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인해 그 인생들이 바뀌었던 수 많은 이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세상 곳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주의 음성을 따르는 자들이 세워져가고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사람은 못 바꾸고, 세상은 감당 못해도. 예수님은 주저않은 인생을 붙잡아 일으켜주시는 분이시다. 나아갈 수 없는 인생을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그렇게 멈춰진 인생을 향해, 예수님의 동행이 필요한 지체들을 향해... 일어나라! 명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더 많은 영혼들에게 들려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그런 일에 쓰임받는 내가 되기를 기도한다.
    • 종교
    2021-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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