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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 트랙제로 3월 ‘이달의 아티스트’ 선정 ‘노래하는 목사’ 황푸하
    [사진제공=멜론] 싱어송라이터 황푸하가 ‘노래하는 목사’라는 독특한 수식어를 얻게 된 배경과 자신만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털어놓는다.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뮤직플랫폼 멜론(Melon)은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를 통해 3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싱어송라이터 황푸하와 함께 한 다채로운 음악 이야기들을 2일 오전 10시30분 멜론 스테이션에서 공개한다. 포크 뮤지션인 황푸하는 이날 멜론 스테이션 ‘트랙제로’ 초대석에 출연해 ‘노래하는 목사’가 된 비하인드 스토리, 이름에 담긴 뜻,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게 된 계기, 숨은 명곡 플레이리스트 등을 전한다. 이어 지난해 발매한 정규 3집이자 출애굽기(Exodus)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담은 앨범 ‘두 얼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며 리스너들과 소통할 예정이다.신앙 생활과 음악 두가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푸하는 “아름다움, 사랑 등이 ‘신’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노래’가 신을 볼 수 있는 창문인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철학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이와 함께 황푸하가 지금까지 발매한 명곡들을 담은 ‘트랙제로’ 플레이리스트도 멜론에 이날 공개된다. ‘첫 마음’, ‘칼라가 없는 새벽’을 비롯해 김사월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멀미’ 등 총 15트랙의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들은 청취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뿐만 아니라 황푸하는 ‘멜론매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세번째 앨범 ‘두 얼굴’을 통해 파격적인 도전을 하게 된 이유와 에피소드 등을 밝히고, ‘아름다움’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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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2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축복의 회복을 위하여(학개 2:10-19)"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성 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 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0-19)“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 제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했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과 장정들과 기술자 등 많은 유다 인 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칠십 년 세월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이처럼 처절하게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들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처럼 우상(偶像)을 숭배하며, 온갖 악행(惡行)들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36:15-20). 그런데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 제국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 인 포로들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역사(役事)였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역대하 36:21-23).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년 만에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온 유다 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드리는 신앙 공동체를 회복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건자재를 구입하고 필요한 인부들을 고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지 이년 두 달 만에 예루살렘성전 재건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방해하는 주위의 적들 때문에 겨우 <전 지대공사(殿地臺工事)>만을 마친 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시들어지면서 그들의 신앙의 열정도 같이 시들어 들었고, 그들은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핑계로 성전건축을 계속 미뤘습니다. 그러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다 인들은 하나같이 재산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화려한 저택을 지어 기거하며 쌓은 부를 과시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이전의 신앙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목표로 했던 신앙공동체의 삶이 이제는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삶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여전히 신앙적 습관은 남아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외적의 침입과,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그 형편이 말할 수 없이 궁핍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자청해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같은 가난과 궁핍의 원인을 알지 못한 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셨고,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전복구공사를 재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어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개 1:9-11)“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인 인본주의적 신앙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학개 1:12)“ 백성들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과, 그 결과로 그 많은 재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 닥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했고, 이전처럼 주저함이나 지체함이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그들의 재산을 드리고, 그들의 인력을 동원하여 중단된 <성전건축>을 재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에 신앙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중심주의 삶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다시 임 재하셨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로다! (학개 2:4)“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시 너희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축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1:12)“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되고 범사가 잘 됩니다. 우리에게서 상실된 축복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상실된 신앙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신본주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의 삶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입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기에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이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입니다. 신본주의의(神本主義) 삶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 되고 하나님께 소유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기에 신본주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아 중심주의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고 다시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소요리문답: 제1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9-10)“ (3) 죄를 멀리하는 삶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1-14)“ (4)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입니다(마태복음 22:37-40,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10)“ (5)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옛날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궁궐을 짓고,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궁궐 밑에 감옥을 지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유럽의 구질서는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개척시대의 청교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예배당을 지었고, 다음으로 신앙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신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에 의거한 미국의 가치관과 미국의 시민정신이 근대 문명사회의 확립을 위한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는 43세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했고, 53세 때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락도 즐기지 않았고,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만이 그의 취미였고, 사업확장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석유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미국 내 동종사업자들을 무자비하게 파산시켜 모두 그의 회사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석유사업의 95퍼센트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적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욕했고, 그에게는 악덕기업주라는 오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한 교회에 거금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냈을 때, 그 교회의 목사가 설교시간에 ‚이 돈은 더러운 돈입니다! ‘고 선언하며, 그 기부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초 10만 달러는 참으로 거금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그는 그의 나이 53세 때,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지만, 바로 그때부터 원인도 모르게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몸에 악성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빠져나갔습니다. 식사 때 마다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까지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에 쫓기듯 불안함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쁨과, 행복감을 상실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갔습니다. 록펠러를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1년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그를 미워하는 언론사들은,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미리 작성해놓고, 그의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보며, 그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자답게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변호사를 불러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재산을 교회와, 사회 복지시설과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또 인류의 복리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식량, 인구, 의학,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활동>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재산관리인들에 의해서 문서에 작성된 용도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발명한 항생제 페니실린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연 기적의 약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위해서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이 이처럼 다방면으로 인류복리를 위해 쓰이게 될 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최악으로 치닫던 그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정상적으로 섭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무표정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그가 일년도 못살고 죽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후 45년을 더 살며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신자인 그가 탐욕에 찌들었던 지난날의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셨고, 그와 함께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9)“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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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5
  • [오늘의 말씀] 스위스한인교회 김정효 목사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사도행전 15:30-41)"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DB]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니라! 수일 후 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 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 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35-41)“ 1.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4-26)“ <안디옥>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시>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 째로 큰 대도시였습 니다. 안디옥은 오늘날의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오십 만 가량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으로 피신을 가 그곳에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한 <유대인>들만의 교회였 다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이라는 벽을 허물고 편견 없이 모두를 품는 <이방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 없는 안디옥 교회가 날로 부흥되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지도하고 이끌도록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하에 안디옥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고,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안디옥 교회에 이제는 함께 이끌어줄 <동역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에, 그가 오래 전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나 잠시 교류했던 <다소> 지방의 <사울>을 데려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소>는 오늘날의 <터기>의 남부지방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울은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에 열심인 자로서,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복음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도록 사주하는 등, 그의 과거의 악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의 기피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그의 진정을 이해하고 포용해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루 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으로 사울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아량과 덕이 많은 <야고보 사도>에게 소개시켰습니다(사도행전 9:26-30, 갈라디아서 1:18 -19).그럼에도 사울은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곧 바로 고향 다소로 돌아가야 했고, 사울의 가치를 알아봤던 바나바는 이런 사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도행전 9:26-30). 사울에 대한 바나바의 안목은 적중했고,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크게 부흥 했으며, 사울의 탁월한 지도력과,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는 신앙적으로, 교리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자 안디옥 교회는 본격적인 <이방 전도>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의 지시 에 따라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울의 탁월한 <전도의 능력> 때문에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 행전 9:15-16)“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이방인 교인>들도 <유대인 교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 를 받아 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교란시켰습니다. 이 문제로 이들과 크게 다투며 논쟁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그들의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해서 보고를 했고, 그들의 보고를 기뻐한 예루 살렘 교회 지도부는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즉시로 <지도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교회공동체> 안에 더 이상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각 <지 교회>에 내려 보내는 편지로 작성해,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먼저 가장 큰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게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전달을 위해 안디옥으로 귀환을 했고, 이로써 그들의 전도여행도 끝났습니다 (사도행전 15:1-35).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의 직무>를 재개했습니다만,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지 교회들>이 생각나, 그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위한 <팀 구성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결별하고, 각각 다른 길로 떠나버립니다. <의견대립의 원인>은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인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떠난 전도단의 멤버였었는데, <전도사역의 효용성>에 회의를 품은 그는 <밤빌리아>에서 그들 일행과 결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때의 일로 그에게 많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가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심성이 착한 바나바는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단호하고 엄격했던 바울 사도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바나바가 그의 생질이기도 한 마가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가의 일로 크게 다툰 후 결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제각기 따로 전도단을 구성해서 떠났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향해 떠났습니다. 구브로를 <헬라어>로 <쿠프로스(κύπρ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구리>입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구리를 의미하는 독일어의 <쿠퍼(Kupper)>, 영어의 <코퍼(Copper) >는 헬라어 <쿠프로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브로가 지금의 <키프러스(Cyprus)>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의견차이>로 <결별>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그들 각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의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27-28)“ 비록 1차 전도여행으로 유명해진 바울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바나바의 배려로 2차 전도여행에 합류 한 젊은 마가는 바나바의 감화력과 가르침을 통해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성장하였는데, <신약성경>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바로 그가 기록한 책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위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후 다른 기록자들이 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상호보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후일 사도 바울은 그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부했던 마가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뒤늦게 그의 가치와 공로를 인정해준 것이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4:11)“ 그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라도 그와 함께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알린 것입니다. 열정만 앞섰지 다듬어지지 못한 마가를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시킨 것은, 다름아닌 바나바 의 <사랑과 인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현재의 모습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실라(Silas)>를 2차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와 교제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라>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실라와의 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소아시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성령께서는 도중에 소아시아로 향하 는 그들의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6-10). <마게도냐>에서 첫번 째로 당도한 성이 <빌립보>였는데, 이곳에서의 <실라>의 역할은 아주 유용했습 니다. 첫째는 그가 마게도냐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로마황제에게 충성했던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의 주민들>에게는 <식민지 거주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라는 언어와 신분 상으로 그들과 대등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라는 여러 면에서 <유럽 선교>에 매우 적절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로마서 8:27-28) 4. <인간의 의지> 가운데 <동역(同役)>하시는 하나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신학용어(神學用語)> 가운데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동류(同流)>라는 뜻인데 '서로 돕다‘, '협력하다‘를 의미하는 <concur>의 명사형입니다. 이 <동류(concurence)>는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에게 작용>되어,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는 당시 본인들이 깨닫지는 못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신학교이지만 1924년경만 해도 이 학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낙심하지 않고, 다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쉐퍼 박사> 바로 옆에서 기도하든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문뜩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닙니까? 그 가축들 중에서 얼마를 팔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가 그 돈으로 이 학교의 빚을 다 갚고, 계속하여 학생들을 양육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사무실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에 가축을 가득 싣고 가서 다 팔았습니다. 저는 원래 이 돈을 다른데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제 마음 속에 이 돈을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니 받아 주십시요! “ 사무실 여자 직원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즉시로 학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여직원으로부터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로 보내주셨습니다! “ 무슨 뜻입니까? 이 목장주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달라스 신학교의 문제해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목장주의 의지>에 그대로 <작용> 한 결과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붙들림 받아야 하고,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당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동역(同役)>해주시는 축복된 신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아멘! >
    • 종교
    2023-02-09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후포스타시스’ – 실상과 증거를 가진 믿음”
    [성경/365산업경제뉴스DB] 2005년 5월 31일 새벽 3시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시고 벽시계로부터 흡사 레이저 광선처럼 내 이마 한 중앙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쏘아주셨다. 한 달 후에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에 영어로 ‘Faith Test’- 믿음 시험이라는 음성이 쑥 찔러졌다. 결국 성령받은 지 33년 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세월이 믿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러했던 것을 알게 하셨고, 이제부터 믿음 시험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들려온 음성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며 댓가를 치르는 희생을 감내하며 이번 5월이면 만 18년이 되는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최종관문인 지금의 오래참음과 인내의 자리까지 따라올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오래 참음, 인내의 결과는 이제 약속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5). 처음에 보여주신 천 개의 퍼즐이 맞혀져 그림이 완성되듯이, 믿음-순종-희생-인내의 긴 연단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제 약속의 땅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가 믿으면” 하고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을 보는 것이며, 풍부함과 풍성한 재정의 약속도 포함된 것이다. 그동안의 기름부으심을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나라들이 그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부흥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적 계시로 그가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되어 믿고 선포하면 현실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며, 하리운에 오래 같이 해 온 분들에게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이번 소드 3년차 ‘조명된 혼과 감취인 것” 질문의 답에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 예언에 비추어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때에 그가 하실 일을 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나가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2주 전, 혹은 1주 전 말씀하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하셨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이번에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며 묻고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음으로 묻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시는 일이 패턴화 된 실상과 증거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매 번 같이 그렇게 하셨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려 주세요” 하고 응답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치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선입견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어떤 일을 주님이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100%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다”는 음성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의 리콜운동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부터 그러한 패턴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 가면 “불이 있을 것이다. 통곡이 있을 것이다” 하셨을 때, 나가기 전에 미리 글로 선포하면 그런 일들이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코비드 19이 기승을 부려 나가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때인 2020년 5월 “이번에 나가면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만남을 통해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고, 아내에게 그해 11월 “이번에 20명이 들어올 것이다” 하신 집회 전 정확히 20명이 들어오고 난 후, 핸폰이 깨어져 연락을 더 못받게 하셨으며, 그후 “더 들어올 것이다” 하신 대로 집회 중 기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 등, 수없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처음 참석한 두 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하고 예언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강력하게 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 목요일 소드 3년차에 다룰 초대교회가 가르친 믿음의 헬라어 원어 중 ‘후포스타시스’ 믿음인 것이다. “‘후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ς)’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예감하고 여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소유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없이 믿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시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고, 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 일의 선두주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시는 것이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보이지 아니하시고서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 주님께서 어제 새벽에 아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사업하는 한 여집사님에게서 그 전날 전화로 사업체 매각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해와 기도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하리운 밴드에 500명이 있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제 에베드 전도사님이 이미 밴드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가입시켜 주세요” 하는 글이 올라와 가입시켜 준 일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전화하고 올 사람이 천 명이다” 하셨고, 이번 천 명 여자 목사들을 시작으로 이전부터 “30명이 준비되면 군대가 온다, 2천, 4천이 온다. 풍성한 재정이 올 것이다”의 실현인 것이다. ***보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다. 그들은 열매를 누리는 선두주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듣고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 눈에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서, 수건이 얼굴을 가려서이다. 아직 자아가 굴복되지 않았고 주님과 진리보다, 주님이 하시는 일보다, 자기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일과 사역이 더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일이 많아서, 사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과연 하나님의 일을 두고 무엇이 바쁘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는 아니다 그래서 구분된다 하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셨다. 그동안 1년 넘게 하리운에 몸담은 분들은 막연히 바라는 그런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제 그 믿음의 확신에 이른 것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리운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시대적/전국적/세계적 부흥의 영광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다!” “내 일처럼, 내 가정 일처럼, 내 사업하는 것 처럼 하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믿는 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대로 순번이 정해지고 있다. 땡큐 로드. 크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종교
    2023-02-08
  • [오늘의 말씀]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1:1∼4)"
    [성경 / 365산업경제뉴스 DB] [1] <요한계시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주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걸 본받으라는 면도 있지만, 인간이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능력의 원천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고, 기독교의 종말적 소망을 만듭니다. 이게 표현된 게 <1∼5절>인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늘 그 나라를 기다립니다. [2] 종말에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은 크리스천 개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의 포로 상태로 지냈던 인간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웁니다.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셨던 인류 역사를 부활의 몸을 입은 인간에게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 새롭게 된 만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ㆍ심판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죄의 포로로 살았던 성도를 새 창조로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 천명한 <로마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이 이 책을 썼던 때의 상황은 바울과 달랐기에 이 책은 이런 말씀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숨긴 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의에 얽힌 상징적 표현들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책과 이 책이 조화를 이룹니다. [3]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흐름에서 <21∼22장>은 천국(天國: 하늘나라)으로 번역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만 보여준 게 아닙니다. <20장>까지 인내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성도에게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준 게 이곳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인간이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타락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에(예레미야서 17:9) 성경은 이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고통을 같이 받은 만물도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8:19∼22). 이런 종합적인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4] <21∼22장>에 나온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은 편집 순서에 따라 <20장> 이후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11:15∼17>에 일곱 번째 천사가 불었던 나팔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맛보기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요한은 <11:15∼17>에서 예고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해 간략한 그림을 보여줬고, <21∼22장>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 성도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이 말하는 메시지를 보면 무천년설의 해석이 전체적인 흐름에 더 맞습니다. [5] 저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읽으라고 권합니다. <1절>은 요한이 본 환상을 기록한 것이고,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정도가 완전ㆍ완벽해서 처음에 만드신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될 걸 그가 환상으로 보고 쓴 게 <1절>인데, <5절>에 따르면 처음 하늘ㆍ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하늘ㆍ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모습으로 그에게 보였는데, 그는 이걸 하늘ㆍ땅이 사라져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새 창조는 만물을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걸 갱신하는 면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20장>의 구성이 그렇다고 해도 이 말씀을 100% 갱신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재창조ㆍ대종말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요한복음 5:24∼25). 따라서 이 말씀을 갱신으로 이해해도 재창조의 입장을 수용하는 게 좋습니다. [6] <1∼8절>은 <1∼5절>과 <6∼8절>로 나눌 수 있는데, 창조 이후 이뤄 오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최고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이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재창조), 변화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루며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끝부분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를 말했습니다(7∼8절).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니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초대교회 성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또 <1∼5절>을 헬라어로 보면 [ABC-D-C'B'A']의 교차 대구법인데, 중심부(D)에 있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2∼3절). 이를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창조의 순서는 <창세기>에 있는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져야 하기에, 요한은 <창세기>의 구성을 의식해 <21∼22장>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인간의 거처인 우주를, 6일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도 하나님은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셨고 그 뒤 새롭게 된 주님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7] 요한은 “바다가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1절). 여기서 “바다”는 우리가 보는 바다가 아니라 <13장>에 나온 것처럼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의 근원을 있게 한 바다가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없어졌습니다. 이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예수님의 신부이자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신부ㆍ거룩한 도성ㆍ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 다섯 번 나옵니다(3:12; 11:2; 19:7∼9; 20:9; 21:2). 이 모티브가 나온 과정을 보면 교회는 원형이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는 사탄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처럼 해 아래 세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화를 거치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새 창조를 준비합니다(2∼3절). [8]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비유로 표현한 결혼생활의 특징은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가구를 사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인격적인 만남을 유지하며 사는 게 성경에서 말한 결혼생활의 특징입니다. 그 나라는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성도의 인격적 만남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누릴 최고의 보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성도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만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그 나라입니다. [9] 혼인 잔치를 치르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서 새 창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히 연합합니다(3절).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전이 돼서 교회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21:22). <3절a>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3절b>와 달리 복수인데, 이는 <7:9>에 나오는 구속받은 백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7:9>에서 144,000명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인데,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이들을 반영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복수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강림 대상을 복수로 지칭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요한복음 14:26; 16:7).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 책은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은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개인에게 몰래 일어나지 않습니다.
    • 종교
    2023-02-04
  •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리콜운동 대표 전두승 목사 “격려하고 들어주고 위로해 주라”
    [365사업경제뉴스DB] 오늘 이곳 토요일 새벽에 “마음에는 안들고 그것 밖에 못하나?” 생각하지 말고, 그 수준에서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하라 하셨다. 어렸을 때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그 정도 밖에 못하나? 그러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좋은 교사는 같은 연령대라도 다 발달 정도가 다르니 잘하는 학생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있는 수준에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어 더 나은 성적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기장이나 숙제 검사에 웃는 그림과 함께 “참 잘했아요”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칭찬하면 좀 부족해도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격려는 가능성을 더욱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폴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시련은 더욱 단단하게 하는 단련, 그리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수준에서 잘한다 칭찬하여 다음 단계로 올라가도록, 성장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우리 하리운 회원 한 분을 보여 주시면서 어려웠던 때에 대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라. 치료해 주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실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 날에 대한 기억의 깊은 내면 속에 남아 있는 과거 상처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치료해 주라고 하셨다. 내적치유 훈련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정을 끝내기도 하였지만, 같이 모여 있어 치유를 위한 실제 사역은 하지 못하였기에, 이론은 알지만 아직 치유받지 못한 감정 치유와 참된 용서를 통한 자유함을 얻도록 도움을 주라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으로는 배웠고 또한 “회개했다, 용서했다, 내적치유를 많이 받아 봤다” 하면서도 아직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이 실제 믿음이 되기 전에는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아직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감정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부르심과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 종으로 팔려가고,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 없이 인내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고난 속에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해를 선으로 바꾸셨다” 고백하며 형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후대한 것이다.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내적치유는 상한 마음의 치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치유하시고 우리의 뿔(권세)을 높이셔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로 쓰시기 원하신다. 주의 행사(하시는 일)를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주를 높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할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2). 시편 92:4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편 92:10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는 삶의 목적과 사명을 알도록 치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종교
    2023-02-03

실시간 종교 기사

  • 브레드하우스 대표 박길웅 목사, '주께서 내게 대해 주시듯'
    “주께서 내게 대해 주시듯” (마18:21-35) 1.용서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어렵다.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어서, 쉽사리 용서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겉으로 혹은 입술로만 ‘용서할게’라고 말을 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는 그 일로 인하여 문제 삼지 않고 어떠한 기억도 떠올리지 않는 정도의 용서를 하는 일은 정말로 어렵다. 3.베드로는 자신이 꽤나 너그러운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여러차례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허물을 덮어주었던 경험을 토대로 ‘누군가를 일곱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한 용서지요?’ 하고 주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다. 4.그러나 주님께서는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해주라 말씀하셨다. 물리적인 490번이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스스로 제한하여 어느 정도면 됐다는 그 기준 자체를 허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5.그러면서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요점은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탕감받은 자가 그에 비할 수 없는 작은 빚을 진 타인을 탕감해주지 않은 한마디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책망하는 점이다. 6.이 말씀을 가만히 곱씹어 우리의 실제 삶과 연관지어 보면, 용서는 용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깊게 파고든다.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죄에서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겪는 어떤 수모나 손해 앞에서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더 큰 일들을 자신은 용서받았기에. 7.결국 우리 자신을 향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영죽을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우리의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자나 혹은 기억치 못하는 자라 말할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로 결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8.물론 이 ‘원리’적인 말씀을 실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기야 힘들겠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출발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9.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용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조금 더디고 어렵게 가더라도, 반드시 가야 할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 종교
    2022-01-18
  • KEEN Ministry Coordinator 정서영 선교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레위기 2장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Season all your grain offerings with salt. Do not leave the salt of the covenant of your God out of your grain offerings; add salt to all your offerings. add salt to all your offerings(13) 기름과 유황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성분의 특성을 통해 소제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소금을 치라는 이 말씀 역시도 소금의 성분적 특성을 이해하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 소금에는 맛을 내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두가지 대표적인 특성이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는 그 특유의 맛이 있어야 하고, 부패되지 않은 순결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맛난 음식 신선한 음식을 드시려고 이렇게 소제의 규례를 정해주신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하나님이 미식가가 아니거나 배고픔을 모르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제물을 준비하는 자의 태도와 자세에 더 관심이 있으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첫 소산을 드린다든지, 고운 가루를 드린다는 점도 드리는 자의 중심을 보시려는 이유에서 임을 본다면. 소금을 치라는 것 역시 소제를 드리는 자의 태도와 자세를 보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하루에서 무엇을 보시기 원할까? 얼마나 좋은 것으로 드리는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드리는지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면 내가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앞에 선한 태도와 자세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리고 놓치면 안되는 부분은 언약의 소금이라 말씀하신 부분과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리라고 정하신 부분이다. 내 삶에 행해지는 모든 것들이 주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모든 행함 속에 주의 약속이 담겨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이유가 변질되지 않고, 그 맛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말씀을 붙잡고 나의 모든 삶의 요소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중요한 것은 그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더해져야 하고 그 삶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녹아져 그 맛을 내야 한다. 세상이 주는 맛은 얼마나 쓴가?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말씀은 얼마나 담콤한가? 그것을 모르면 오늘 하루도 힘들고 고달프고 맛없는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내 삶에 충분히 담겨 있으면 어떤 하루를 살더라도 맛깔난 식사를 하는 것처럼 힘이나고 즐거울 것이라 믿는다. 아멘
    • 종교
    2022-01-15
  • 기독교신앙회복연구소 대표 김완섭 목사, '이웃의 문을 활짝 여는 나눔의 삶'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 기독교신앙의 출발점이다. 복이든 저주이든 하나님께 전부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거기에서 희생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인간관계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란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참된 이웃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고귀한 사랑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볼 때 자기 자신과 같이 볼 수 없다면 이웃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를 깰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시험은 통과된다. 이웃사랑에 대한 중대한 원리는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뱀으로 인하여 내리셨던 그 어떤 벌이나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천국에는 오로지 사랑만이 존재한다. 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야기에 천국을 제시하겠는가? 원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천국이다. 낙원을 잃어버린 결과가 지금 현재라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진정한 이웃사랑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사에서 단 한 번 남자의 다스림을 받지 않은 여자를 통하여 메시아를 허락하셨다. 뱀을 끌어들인 여자로 하여금 그 뱀을 다시 쫓아내도록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뱀을 쫓아내기 위해서 남자(죄인)의 다스림을 받으면 실패할 것이고 예수님(의인)의 다스림을 받으면 성공할 것이다. 적어도 복음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뱀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땅의 해방, 육신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민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잃어버린 것을 방치하면 격차는 영구해지고 신분도 정해질 것이요 그것이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원리에 따라 아예 제도적으로 이웃사랑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누군가가 소외되거나 가난해질 가능성을 최소화함으로써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기를 힘쓰시며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 희년개념인 것이다.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사랑을 말해야 한다. 정의는 심판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용서로 이어지지만 하나님은 이 모순되는 개념을 같은 것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과 용서로 성취될 수 있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다. 가장 차별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타국인들도 결코 차별하여 판결하지 말라고 강조하신다. 이스라엘의 이웃사랑은 누구를 도와주기 이전에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지 말고 공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웃사랑의 본질이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이 공동체 내의 형제를 말한다고 해도, 오늘날 이웃사랑의 내용이나 방법과 동일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민족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이웃사랑이었다면 신약 이후에는 영적인 공동체를 거룩하게 지켜내는 이웃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안으로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이웃사랑을 분출해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을 통해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한다. 언어로서의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 이웃사랑이라는 삶으로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웃사랑은 영혼사랑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가 내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도 내 자신의 영혼만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까지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에 이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불신이웃들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의 영혼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알게 모르게 어려움이 오고 문제가 생기고 힘들어지고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은 끝까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영적 싸움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인간적인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세상적인 논리나 힘을 의지하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 마귀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원수사랑 같은 것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마귀에게 치명타가 된다. 세상의 힘이나 권력이나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모든 영적 싸움의 비결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 복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웃들에게 전파된다. 기본적으로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복음의 생명력이 전파된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어주신 극진한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는 섬김이 가장 핵심적인 복음전파의 통로이다. 하나님의 최상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따라 산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가? 성경에는 싸우면서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투는 사람들을 통해서조차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
    • 종교
    2022-01-14
  • Next 세대 Ministry 대표 김영한 목사 북리뷰, '코칭의 정석'
    이동운 코치의 책, <코칭의 정석> 참 참신하다. 하브루타와 코칭은 가정, 소그룹, 교회에 접목할 부분이 정말 많다. 특히 목회자, 선교사, 공동체 리더십은 잘 배워서 익혀 놓으면 좋다. 이 도구와 틀을 사용하면 목회, 상담, 목양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코칭의 정석을 읽으면서 잠시 멈추고, 좀 더 생각하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 내용은 좀 더 곰곰이 숙고하게 되었다. 열쇠가 되는 상위 레벨의 내용이 정리 될 때, 하위 레벨의 주제가 열리고, 해결 된다는 내용이 와 닿았다. 상위 레벨은 1) 정체성 2) 신념과 가치이다. 하위 레벨은 1) 능력 2) 행동 3) 환경이다. 사람의 능력, 행동, 환경은 상위 레벨인 정체성과 신념과 가치가 정립 될 때, 하위 레벨이 해결이 된다고 한다. 즉, 행복하기 위해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 때 행복하기 위해 발휘해야 할 능력과 필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위 레벨에 집중해 코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 레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말한다. 목회를 하면서 상담을 하고, 한 사람을 섬길 때 정말 어디에 초점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이끌어 주고 있는가? 우리는 때로 환경, 능력, 일어나야 할 변화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한 영혼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그리고 신념과 가치가 어떠한지 점검해 주고, 같이 지속적으로 체크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소명, 비전, 사명에 있어 바른 인식이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코칭을 하는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코칭적 방법은 아주 좋다고 하니 이런 코칭을 해 주어도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받는데 목회적으로 더 케어해 주고, 섬겨 주면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 안에서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브루타 그리고 코칭은 인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칼을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잘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이듯 하브루타와 코칭도 그렇다.
    • 종교
    2022-01-13
  •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 '질병으로부터의 자유(1)'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 1 성도들이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는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두 번째는 “주님이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의 주님께서 우리들이 질병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주님은 마가복음을 통해서 그 답을 주고 계십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 주님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고쳐 주실 뜻이 없다면, 그분의 능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주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가복음 1장 40절과 41절을 보면서 주님이 그 문둥병자의 질병을 고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정말, 나의 질병도 고치기를 원하실까?” 혹은 "주님은 지금, 나의 이 질병을 고치시기 원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의심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고통을 참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온전히 동행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들이 이미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었는데,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물론, 때로는 주님이 우리들의 성장을 위하여 잠시 그 질병을 허락하실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주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치열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의 크기만큼 더 간절한 목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 간절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명확하면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적절하게 타협하려고 하지 말고 100%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아니면 특별한 주님의 뜻 가운데서 이 질병이 다소 오래 진행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 순간에도 철저히 인내하되 주님을 바라보는 것까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주님 바라보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 즉시 우리들의 생각을 자아에게로 돌리고 사탄에게 미혹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그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주님께 다시 기도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주여, 나를 자유케 하옵소서!” "주여, 나를 이 질병, 혹은 병마로부터 풀어놓아 자유케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알아 주의 일을 더욱 담대히 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
    • 종교
    2022-01-08
  • 다니엘미션미니스트리 오준섭 선교사, '독이 아닌 복이 되는 만남'
    독이 아닌 복이 되는 만남 1.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만남을 통해 인생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기도 하고, 만남을 통해 냄새나는 폐수처럼 오염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2. 인생의 꽃을 피우게 하는 만남은 과연 어떤 만남일까요? 인생을 꽃 피우게 하는 좋은 만남은 꿈을 주고 스스로 그 꿈을 찾아 가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는 만남이라고 생각됩니다. 3. 저는 군 복무를 이집트에서 했습니다. 외롭고 힘든 타지 생활에서 저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항상 본받고 싶은 김병석 목사님과 양귀선 사모님이십니다. 그분들을 통해 저는 비전을 가지게 되었고, 그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지금까지도 그분들은 저를 잊지 않으시고 먼저 연락해주십니다. 때때로 안부를 물어봐주시고, 지혜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함께 고민해주십니다. 기도 요청을 하면 밤낮으로 기도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5. 감히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선생님들을 잘 만나서 제 인생 전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그 만남은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6. 하지만 지우고 싶은 만남이 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만남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 만남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길로 가도록 이끄는 만남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익 관계로 얼키게 되고, 사리사욕으로 설키게 되는 만남입니다. 7. 심지어는 이용만 당하는 만남들도 있습니다. 사기 당하는 만남이며, 독이 되는 아주 위험하고 위태한 만남입니다. 8. 우리는 복이 되는 만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독이 되는 만남, 악이 되는 만남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독이 아닌 복이 되는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9.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좋은 만남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만남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독이 아닌 복이 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를 통해 만남이 더욱 풍성해지고 그 만남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빌레몬서 1:6
    • 종교
    2022-01-07
  • 브레드하우스 대표 박길웅 목사, '하나님의 속마음'
    “하나님의 속마음” (겔18:21-24) 1.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살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찾고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신다. 2.하나님은 당연시 여김을 박탈하시는 분이시다. 그간 선한 일들을 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따랐다는 사실이, 훗날 그가 행하는 어떤 악행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3.각 사람은 그가 행한 그대로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그 악행에 걸맞는 심판을,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그 선행에 걸맞는 상급을 주신다. 4.그러나 이 말씀들은 심판과 상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이킴과 견고함에 중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5.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정말 극악무도한 자들에게 무자비한 심판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엎드릴 때 기뻐 받아주신다 말씀하셨다. 6.또한 이미 하나님 품안에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의 즐거움과 타락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견고하게 진리와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도록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신다. 즉, 우리로 하여금 ‘이탈방지’를 촉구하신다. 7.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 우리가 언제쯤 잘못을 저질러 징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언제고 돌이켜 하나님께 달려가는 ‘방향전환’에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 종교
    2021-12-28
  • 한양제일교회 이승무 목사,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1372~1415)는 26세에 프라하대학 철학과 신학교수(1398), 28세에 신부(1400), 37세에 총장에 오른(1409) 천재적 신학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와 부당한 세금 강요와 그릇된 신학에 맞서서 비판하다가 끝내 이단 판정을 받고 퇴출되어 화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어떤 제자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진리를 배우며,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를 말하며,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진리를 지키리라.”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을수록 그것에 집착합니다. 빠르게 성공의 사다리를 밟은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성공 지향적 삶은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우위에 세우고 우월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문제는 이 우월감이 곧 행복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속에 갇혀 사는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으며 언제 어떻게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그러합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삶과 죽음이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진리입니다. 그에게 오직 그것 만이 유일한 가치였던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종교
    2021-12-22
  • KEEN Ministry Coordinator 정서영 선교사, '100프로 순종하는 자'
    출애굽기 10장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that you may tell your children and grandchildren how I dealt harshly with the Egyptians and how I performed my signs among them, and that you may know that I am the LORD.” 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Then Moses and Aaron were brought back to Pharaoh. “Go, worship the LORD your God,” he said. “But tell me who will be going.”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No one could see anyone else or move about for three days. Yet all the Israelites had light in the places where they lived. “But tell me who will be going.”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듯 하다. 정신차릴 만큼 혼쭐이 낫을 듯도 싶은데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지 아니면 정말 자존심이 센건지 그냥 센척인지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딜을 하려한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정말 온 백성이 죽어나가고, 온 지면이 쑥대밭이 되어야만 제 정신을 차리려는지... 말씀을 읽다보니 이렇게 자존심만 쎄고, 고집불통이며 상황 파악이 잘 안되고 있는 이 왕의 태도에서 나의 모습들이 오버랩되기 시작한다. 그저 수 천년 전 먼 나라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읽어갈 내용임에도 말씀에 나오는 상황과 대화들과 인물들의 태도들이 지금 나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것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상황이 내게 말해주어야 내가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100퍼센트 인정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릴 수 있을 것인가? 믿는다 말하지만, 나는 그의 자녀이고 제자라 말하지만 정작 나의 삶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께 어처구니 없는 딜을 시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살려줬는데 구해줬는데 이제는 알아서 나를 책임지라고 적반하장격으로 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제 다시 주님 앞에, 이제 다시 말씀 앞에, 이제 그의 자녀요 그의 제자로. 100퍼센트 엎드리는 내가 되길 원한다. 내 것, 내 계획, 내 생각, 내 삶... 내 미래도, 내 시간도.. 모두 주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 2021년... 얼마 남지 않은 한 달. 그리고는 새로운 한 해.. 다시 시작이다. 주 앞에 100퍼센트 순종하는 우리가 되자.
    • 종교
    2021-12-21
  • 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무명하지만'
    우리는 보통 유명한 사람들이 고백하는 간증을 주목한다. 그래서 우리도 유명해져서 간증해야겠다고 꿈꾼다. 여기서 기인한 것이 소위 말하는 ‘고지론’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은 유명하게 되서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무명했을 때부터 하나님을 고백해왔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을 뿐이다. 고지론의 함정은 ‘그 사람’ 참 멋지다 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나도 그렇게(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나도 잘 되고 하나님 이름도 높이고 모든 것이 좋아보여 우리로 하여금 이 마음을 품는 것이 매우 성경적이라는 생각을 주입한다. 한 편 지금 당장 하나님을 간증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도 준다. 아직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목소리는 아껴두는 것이라는 정당성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종의 완벽한 자기 합리화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통하여 우리가 ‘그 사람’을 주목하길 원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유명해진 사람’이 고백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명의 시절부터 함께 해오신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명의 시절을 견디게 하신 ‘하나님’… 무명의 시절부터 한결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름 ‘하나님’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우리가 도전받아야 할 것은 ‘유명해져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훗날’이 아니라 ‘무명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있다고 고백하는 ‘오늘날’이다. 오늘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꽃을 피우며 하나님만으로 살고 있다고 하나님 때문에 견딘다고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종교
    20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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